라가르드 “그리스 빚 탕감 없인 회생 불가” 메르켈에 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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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국제통화기금(IMF)발 지진.’

 19개 유로존 국가 정상들이 17시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마련한 합의안대로 굴러가던 차였다. 하지만 합의 하루 만인 14일 국제통화기금(IMF)의 비밀 보고서가 유출되면서 정국이 묘해졌다.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지진’이란 표현을 쓴 이유였다.

 IMF의 진단과 전망은 합의안과 달리 훨씬 비관적이었다. 대규모 부채 탕감을 해주거나 30년 상환 연기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IMF는 발을 뺄 수도 있다는 뉘앙스였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주도한 정국에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가 반기를 든 격이다. 사실상 유럽의 지도자에게 장차 프랑스의 대통령이 될지 모를 이가 도전한 셈이다.

 라가르드 총재의 IMF는 3쪽짜리 보고서에서 “그리스 국가 부채가 대단히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봤다. 2년 후 국내총생산(GDP)의 200%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했고 이런저런 긴축 조치에도 2022년 170%선을 유지한다고 봤다. 2주 전 예상치는 각각 177%에 142%였다. IMF는 유럽중앙은행(ECB)이 긴급 유동성을 제한하면서 그리스 정부가 자본 통제에 나선 게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판단했다. IMF는 유로존의 그리스 재정 흑자 목표치나 성장 전망도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봤다. 부채 탕감이나 30년 이상의 상환 유예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까닭이다. 이는 메르켈 총리가 모두 거부한 내용이다. 메르켈 총리는 만기 연장을 의미하는 부채 재조정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사실 IMF는 구제금융의 대명사다. 그리스가 받은 구제금융 2400억 유로(약 320조원) 중 13%(320억 유로)가 IMF의 몫이다. ECB(200억 유로)보다 더 많은 돈을 꿔줬다. 유럽연합(EU)·ECB와 함께 채권단 트로이카 중 하나다.

 그럼에도 메르켈 총리에 막혀 IMF는 변변히 힘을 써보지 못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12~13일 유로존 정상회의 직전에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리스 문제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지만 합의안에서 그의 목소리를 찾아보긴 어렵다. IMF는 앞서 그리스의 5일 국민투표를 앞두고도 부채 재조정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메르켈 총리는 꿈쩍도 안 했다.

 라가르드 총재의 좌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2년 2차 구제금융 당시에도 메르켈 총리의 시나리오가 관철됐고 그리스의 부채가 2022년까지 110% 수준보다 상당히 떨어질 것이라고 봐서 IMF가 개입했다. 결과적으론 메르켈 총리의 시나리오가 틀린 셈이다.

 문제는 IMF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부채에 대해선 구제금융을 해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IMF의 보고서를 “IMF가 3차 구제금융에서 발을 뺄 수도 있다는 신호”(파이낸셜타임스)라고 해석한다.

 라가르드 총재로선 그동안의 약세를 역전시킬 한 방이 있다는 얘기다. 만일 라가르드 총재가 진짜로 발을 뺀다면 메르켈 총리로선 악몽일 터이다. 이번 합의안을 만들면서 메르켈 총리는 IMF를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구제금융 860억 유로 중 164억 유로가 IMF에서 나와야 한다. 또 2018년까지 그리스의 개혁 조치를 감시하는 역할까지 맡겼다. IMF가 “그만 두겠다”고 하면 합의안 자체가 허물어진다.

 그리스로선 아이러니해졌다. 지난 5년간 긴축의 고통으로 이번 합의 과정에서 IMF를 배제하려고 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막판까지 버틴 대목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부채 탕감이란 치프라스 총리의 주장을 편든 건 IMF였다. 그리스 언론은 “IMF와 유로존의 분열로 결과적으로 부채 재조정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 의회는 15일 첫 숙제인 부가가치세 등 개혁 입법안 처리에 나섰다. 치프라스 총리는 전날 TV인터뷰에서 "합의안을 (좋다고) 믿진 않지만 기꺼이 이행할 것이다. 그게 그리스가 유로존에 잔류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득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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