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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오늘 미술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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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엠마오의 만찬, 1629, 42.3×37.4㎝, 자크마르 앙드레 박물관.

이들은 며칠 전 희망을 잃었다.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줄 걸로 알았던 메시아가 무참히 죽었다. 도망치듯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며 두 제자는 대체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나 개탄한다. 낯선 젊은이가 여기 끼어 동행한다. 이 나그네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기록을 설명하며 희망을 말한다. 다시 마음이 뜨거워진 두 사람은 나그네를 저녁 식탁에 초대한다. 청년이 빵을 나누며 축복할 때 비로소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그림의 주인공은 놀란 제자다. 청년의 후광이 제자의 놀란 표정을 비추고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얼굴은 신비롭게 가려져 있다. 23세 렘브란트(1606∼69)가 한껏 공들여 그린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그리고 2년 뒤 암스텔담으로 진출,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는다. 성공을 앞둔 신인 화가의 밝은 그림이다.

렘브란트, 엠마오의 순례자들, 1648, 68×65㎝,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42세, 렘브란트는 같은 주제로 또 그린다. 부활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빛이 제자들을 따뜻하게 감싼다. 제자들은 변화를 아직 모르는 듯 차분하다. 그림 속 각종 물건들이 “아직도 모르겠어? 이 분이 그리스도시다” 하는 듯하다. 어린 하인이 가져온 접시 위 두 쪽으로 쪼개진 양 머리, 예수 오른쪽에 거꾸로 놓인 빈 유리잔 등이 죽음의 모티브다.

이에 앞서 1642년 렘브란트는 ‘야경’을 그렸다. 오늘날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당시엔 그를 곤두박질치게 한 그림이다. 이 ‘작가주의’적 그림은 주문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렘브란트는 파산한다. ‘엠마오의 순례자들’은 그로부터 6년 뒤 나왔다. 그가 향하던 엠마오는 어디쯤이었을까. 과시적 청년에서, 남의 시선을 거두고 자기를 응시하는 원숙한 예술가가 된 그가 붙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무엇이었을까. 오는 15일은 렘브란트의 생일, 500년 전 그가 태어난 날이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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