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아침]-'구멍에 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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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길상호(1973~), '구멍에 들다' 부분

아직 몇 개의 나이테밖에 두르지 못한 소나무가 죽었다
허공 기워 가던 바늘잎 겨우 가지 끝에 매단 채 손을 꺾었다
솔방울 몇 개가 눈물처럼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나무가 죽자 껍질은 육체를 떠난 허물이 되어 떨어지고
허연 속살을 살펴보니 벌레들이 파 놓은 구멍이 나무의
심장까지 닿아 있었다 벌레는 저 미로와 같은 길을 내며
결국 우화(羽化)에 이르는 지도를 얻었으리라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구멍 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 헤매고 있었겠지



벌레는 살아남기 위해 어린 소나무에 구멍을 내고 그 속에서 살다가 우화에 성공했다. 어린 소나무는 그 구멍 속에 자신을 구겨 넣고 삶의 통로를 막았다. 벌레가 만든 구멍은 자신에게는 생명의 온실이지만, 소나무에게는 죽음의 밀실이 된 것이다. 혹시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의 공간에다 그런 구멍을 만든 적이 없었는가? 나는 소나무 몸에서 우화를 시작한 솔잎혹파리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박덕규<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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