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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사건 번역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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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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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성완종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가 나왔다. 성씨의 대선자금 지원 의혹은 사실무근이라고 했다. 대통령 하명사건 성격을 띤 사면로비 의혹도 마찬가지다. 크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이인제 새누리당 의원과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대한 지속적인 수사 방침이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뭘까. 검찰은 왜 사건을 종결하지 않을까. ‘박근혜 번역기’ 형식을 빌려 ‘성완종 사건 번역기’를 돌려봤다. 집단지성을 이용한 인공지능은 아니다. 몇몇 검사의 의견을 토대로 한 만큼 번역본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번역본의 완성을 위해선 특검 도입이 불가피하다. 근데 특검 도입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야당이 변변치 않아서일까. 아니다. 검찰이 열쇠를 꽉 쥐고 있기 때문이다.

 “김 의원, 계속 버텨주세요”=검찰은 한때 이인제·김한길 의원을 소환하지 않고 기소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이들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했다는 의미다. “소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 데는 어떤 의도가 있을까. 번역기는 “검찰의 속마음에는 두 의원이 가급적 오랫동안 소환에 응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해석했다. 쉽게 말해 포커게임의 ‘블러핑 전략’이란 것이다. 왜냐고? 하나는 청와대를 의식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정치권을 향한 경고의 의미가 깔려 있다.

 검찰 내부에선 “청와대가 이인제 의원 수사를 못마땅해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성완종 리스트에도 없고 사면 의혹과도 관련 없는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를 뜬금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국회법 개정안으로 촉발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사퇴 여부를 놓고 정치권이 크게 출렁대는 마당에 검찰이 ‘눈치 없는 짓’을 했다는 의미다. 김한길 의원이 “야당 탄압”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은 검찰로서는 ‘울고 싶었는데 뺨 때려준 격’이 됐다. “김 의원님, 제발 계속 버텨주세요”라는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다. 검찰은 ‘유승민 사태’가 가라앉은 뒤 이 사건을 처리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사실 그럴 가능성이 크다.

 만약 두 의원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의원직 상실은 물론 정치적 생명에도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런데도 정치권이 특검 도입을 추진할 수 있을까. 검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두 의원에 대한 수사는 정치권의 특검 논의에 큰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사면 수사, 얘기 안 돼”=검찰 내부에서 계속해 논란이 일었던 부분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사면 로비 가능성을 언급하며 검찰에 수사 착수를 요구하자 소장파 검사들은 반발했다.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검찰 수뇌부는 형사소송법(195조) ‘검사는 범죄 혐의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 사실과 증거를 수사해야 한다’는 조항을 수사팀에 전달했다. 검찰은 2005년과 2007년 두 차례 사면 과정에 노건평씨가 5억원을 챙긴 사실은 발견했지만 사법처리는 하지 않았다.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다. 하지만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 자체가 특혜”라는 법적 해석이 속내에 묻어 있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물타기 위한 정치적 꼼수로 검찰에 부담을 지웠다”는 항변도 번역기 속에 들어 있었다.

 “수사 의지를 묻지 말라”=검찰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검찰의 해명은 일관됐다. “리스트 속 인사들에게 돈을 주는 것을 봤다는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계좌추적이나 압수수색을 할 수 없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이완구 전 국무총리의 케이스는 관련 증인들이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까지 검찰은 “어려운 수사 환경” “수사 여건이 좋지 않다”는 발언을 자주 했었다. 일부 검사는 “리스트의 인사들에 대한 조사 방법까지 청와대가 일일이 챙겼다”고 말했다.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가 서면조사로 이뤄진 배경일 것이다. 수사 결과문만 읽고는 서둘러 기자회견장을 나가는 수사팀장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론 번역기가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