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7)이렇게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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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아이들이 모두 착하게 자라주니까 고생한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85학년도 대입학력고사에서 3백34점을 따내 자연계 수석을 차지한 송현주군(18·제주제일고3년)의 어머니 김정희씨(54)는 10년째 제주KAL호텔에서 객실 청소일을 하고 있다.
연중 찾아드는 신혼부부의 신방을 꾸며주고 서비스업소의 분위기를 위해 먼지하나없이 치워내는 일을 매일같이 되풀이한다.
부농의 가정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대구의 명문 경배여고를 졸업한 김씨는 남편이 목재상을 하다 실패한뒤 디스크까지 앓아 가장역할을 못하게 되자 지난71년 제주에 들어와 떡장사를 시작으로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공설운동장에 경기가 열릴때마다 떡을 머리에 이고 나가 관중들에게 팔았으며 여름에는 딸기장사를 하기도.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친지의 소개로 제주 KAL호텔 룸 메이드일을 맡은지 10년.
월11만7천원의 급료와 봉사료 월평균 6만원등 17만7천원을 받아 남편의 약값과 아들 형제의 학비를 대고 있다.
딸 혜영씨(29)는 결혼했으나 서울대 사범대학 3학년에 다니는 장남 정균군(22)과 이번에 수석의 영광을 안은 막내 현주군의 학비부담이 가장 어려운 문제.
그러나 아들 형제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소망 속에 가난과 고생을 잊고 산다고.
작년 여름 바캉스때 경배여고 동기생이 가족과 함께 제주KAL호텔에 투숙, 즐거운 휴가를 지내는 것을 보고 몹시 부러웠지만 성장하는 자식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달랠수 있었단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외동딸을 가난때문에 대학에 보내지 못한것이 한스럽지만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느낀다고.
지금의 룸 메이드직도 내년이면 정년이기 때문에 벌써부터 걱정이란다.
지난 연말 막내 현주군이 수석을 했을때 방학으로 내려온 장남까지 온식구가 부둥켜 안고 울었다.
아이들의 공부방 하나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한 아쉬움을 삼키는 김씨는 정초에 조중훈KAL회장이 제주에 내려왔다가 격려금을 주고 현주군에게 대학 4년동안 학비를 대겠다는 약속을 해 지금까지의 모든 고생이 보람으로 바꿔었다. <제주=김형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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