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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바다를 향하는 사람들|이대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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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등장인물>어머니 딸 아들 간호원1 간호원2 아버지

<무대배경>
파도의 울부짖음 소리가 처절하게들려 오는 바닷가 절벽 꼭대기의 나무로 만들어진 집. 그 집의 내부 한 부분이 이 극의 무대로 사용된다.
무대 뒤쪽에 작은 창문이 걸려 있고 -그것은 곧바로 바다를 바라다볼 수 있도록 바다쪽으로 뚫려져 있다-창문 양옆으로는 회색 그물이 즐비하게 널려져 있으나 사용을 한지 오래 되었는지 거미줄로 또 하나의 그물들을 새끼치고 있다. 그 주위에 꼿꼿이 세워져 있는 낚싯대들은 낡은 그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새 것이며, 사람의 손길이 자주 오가는지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무대 후면에서 우측으로는 나무로 만든 이층 침대가 벽에 바짝 붙어 있고, 군용색의 모포가 어지럽혀진 채로 침대 위에서 뒹굴고있으며, 전면으로 계속 연결되는 벽의 중앙에는 부엌으로 통하는 문-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방들이 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알 수가 없다-이 하나 보인다. 앞으로 계속 내리 뻗은 나무 벽의 상단에 호롱불이 이쪽 저쪽으로 흔들리고 있으며 그 밑에 잘 패어진 나무들이 질서없이 흐트러져 있다.
좌측으로는 후면과 만나는 곳으로부터 약간 떨어져 쪽이 좀은 통로가 있는데 그 끝에는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매달려 있으나 관객석에서 보아 반 이상은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통로에서 무대전면으로 연결되는 벽에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계절이 계절이니 만큼 사용한지 퍽 오래되어 보이며 주위의 모든 벽이 나무로 되어 있는데 비해서 유독 돌로 되어 있기에 아주 묘한 기분을 자아내고 있다.
무대중앙에는 자주 수리한 것으로 보이는 초라한 탁자가 볼품없이 자리하고 있고, 주변으로 나무 의자가 질서 없이 널려져 있다.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무대.
막이 오르면, 때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옮겨가는 시기의 어느 깊은 밤, 스산하게 바람이 불고 있다. 간간이 파도소리가 바람소리에 얹혀 소나타를 연주하는 음울한 무대. 중년을 넘어선 여인이 벽난로 쪽의 무디게 생긴 의자에 앉아 불씨 없는 벽난로를 우울하게 응시하고 있으며, 무대후면에는 다른 여인이 맥없이 서서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데, 두 여인 모두 집안 내부의 분위기에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다. 막이 오르고도 한동안 두 여인은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조용한 적막감이 흐른다. 잠시 후, 나지막이 한 여인이 말을 꺼낸다.
어머니-(중년을 넘어선 50대 초반의 여인. 나이에 맞게 적당한 주름살이 패어 있으며, 비교적 고운 피부의 소유자. 무뚝뚝한 어조에 애써 애정을 담으려 노력하며)멀잖아 벽난로에도 불씨를 던져 주어야 하겠구나. 올해는 유달리 날씨가 빨리 차지는 것 같아.
딸-(계속 창 밖을 내다보며 차분하게)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바람이 보통 아닌데요.(사이.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더 세차진다)파도도 지지 않으려 하는데요.(서서히 돌아서는 그녀는 20세 전후로 보이는데 어머니를 매우 많이 닮은 모습으로, 가꾸지는 않았으나 상당한 미인이다) 이런 날씨면 왠지 여기가 이상한 기운으로 가득차 올라오곤 해요.(양팔로 배를 감싼다)잔잔한 파도소리보다는 반항하는 그 소리가 왠지 더 자연스럽게 들리거든요.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가봐요.(어머니의 시선과 마주치자 얼떨결에) 미안해요. 아버지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어머니-아니다. 넌 잘못한 것 하나도 없다. 나 역시 이런 날씨가 좋아. 비까지 와주었으면 더 좋으련만.(양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이 좋은 날씨에 왜 이리 몸이 뻣뻣해지는지…. 오빠는 또 어딜 나갔니?
딸-(어머니에게로 다가서며)요 앞절벽 끝에 앉아 있어요. 같이 앉아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의 알이 없어요. 가끔씩 내뱉는 말이 무서워서 저 먼저 돌아온 거예요.(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주무른다)
어머니-고맙구나. 아주 시원해. 추울텐데 일찍 들어오지 않고…. 그래 무슨 말을 하든?
딸-아니, 아무 것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어머니-괜찮아. 얘기해도 돼.
딸-정말로 아무말 안했어요.
어머니-(딸의 손을 잡으며 한숨으로) 요새 와서는 너를 멀리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창 발랄해야 할 네가 그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니 말이다. 오, 손이 왜 이렇게 차갑지?
딸-(손을 빼서 다시 주무르며)어머니 손에서도 한기가 들고 있어요. 여간 찬게 아닌데요?(사이)떨고 계시군요.
어머니-아니…!
딸-속이려 하지 마세요. 저녁때부터 떨고 계셨어요. 날씨 때문에….
어머니-그런가?
딸-(손을 멈추고 무의식적으로) 오빠가 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뛰어요. 무섭기도 하구요.(다시 참가로 가서 창 밖을 내다보며)저주받은 가문이래요. 계속 그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가끔, 바닷속은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조용히 노래하고 있을 것이라고 중얼거리곤 해요. 그리고는 날 차갑게 바라보면서 바다 깊은 곳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신비의 세계가 있으니 구경하고 싶지 않느냐는 거예요. 전 오빠의 눈빛이 무서워 그 자리를 피했는데….(오른쪽 침대에 앉아 손장난을 하며)자꾸 오빠가 불쌍해져요. 서울에서 돌아온 후,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어요. 벌써 열흘이다 되어 가는데도 말예요.
어머니-네 오빠를 다시 서울로 올려 보내야겠다. 이런 곳에서 살기에는 부적합한 애야. 그렇게 되면 너도 같이 떠나거라. 오빠가 대학을 졸업했으니 널 돌봐줄 수 있겠지.
딸-오빠는 할 일이 있어 돌아온 거래요.
어머니-(조용한 반응)할 일?
딸-(급작스레 화제를 돌린다)전 지금 같은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요. 어머니 때때로 찾아오는 낚시하는 분들과의 대화가 재미있거든요. 엊그제 오셨던 분은 겨울이 깊어지면 다시 오겠다고 하시며, 그때에는 저 벽난로의 먼지가 붉은 불꽃으로 변해 있겠다고 하셨어요.(웃음을 지으려 하나 어색하다)
어머니-아니다. 너희들만이라도 이곳을 벗어나야 해. (머리를 저으며)이렇게 바다로 오지 말았어야 했어. 너무도 무료한 생활이야. 앉아서 생각 속에 잠기는 것도 이젠 진력이 난다. 바쁘게 돌아다니며 해야할 일거리가 사람에겐 필요하거든. 언젠가는 나도 네 아버지처럼 미치고 말겠지. 아낙 지금 내가 무슨 소릴 하는거지? 저 양동이에 있는 물좀 갖다 버리거라. 이틀 전에 고기를 닦은 것인데 아직 그대로 있구나.
딸이 벽난로에로 와서 양동이를 들고 부엌문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천천히 일어나서 후면 우측의 2층 침대로 가서 끝에 걸터앉아 담요를 정리한다. 물을 버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부엌을 향해) 그리고 먼저 들어가서 장을 자도록 해. 오빠는 곧 들어오겠지.
딸-아니요.(문을 열고 나와서 양동이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며) 같이 들어가겠어요. 잠도 오지 않고 해서.
어머니-(담요의 먼지를 무의식적으로 털어 내며) 손님들이 다녀간 뒤엔 왠지 더 쓸쓸해지거든. 글쎄 그 쓸쓸함이란 내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부모의 성격이 맞지 않아 자식들에게까지 화가 미치니 그게 좀 안타까울 뿐이지.
딸-저희들이야 괜찮지만 어머니가 겪으신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면….
어머니-(쓴웃음을 지으며)모두가 다 지난 일이야. 이제는 추억이 돼버려서 무척 재미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거든?
딸-아직 끝이 난 것은 아니예요 어머니.
어머니-(잠시 생각하다가) 그래 끝난 것은 아니지. 아직도 진행중이니까. 끔찍하구나, 언제나 끝이 날는지. 정신병원 문을 두드리기에도 이젠 지쳤어.
딸-어머니는 바다를 떠나시는게 꿈이셨죠. 하지만 아버지는 바다를 너무도 사랑하셨구요. 아버지가 이렇게 병원에 입원하시게 된 것은 어머니의 꿈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예요. 미안해요. 쓸데없는 소릴 해서.
어머니-그래, 옳은 말이다. 네 아버지는 변화무쌍한 도시의 삶을 피해 바다로 오신거야. 변하지 않는 영원의 세계를 바다로 생각했던 것이지. 그러나 난 변화 없는 단조로운 생활에 곧 싫증을 느꼈어. 그래서 이곳을 떠나 다시 도시로 돌아가자고 요구했었지.(씁쓸한 웃음) 그때부터 네 아버진 나를 마구학대하기 시작했어. 나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는 미쳐갔던게야. 둘중 어느 것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정신병원엘 보내 보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꼭 탈출을 했으니 그것도 소용이 없었고, 괜히 내게 오는 멸시와 행패만 더 심해졌을 뿐이었지. 그래서 내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은 버리고 조용히 참는 것이였어. 면역이 생길 때까지.
딸-아니예요. 그 방법은 면역되질 않아요. 초저녁부터 어머니는 두려워 하셨어요. 그렇지만 애써 그 감정을 감추려 하는거죠. 그렇지 않나요? 오늘 같은 날씨는 어머니를 두려운 감정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했거든요?(바람·파도소리 거세어진다. 사이. 침묵. 듣고 있다가 의 미 심장하게) 꼭 이런 날이었잖아요.
어머니-(몸이 떨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래 이런 날이었지. 내가 이곳을 떠나자고 알을 하면 이상하게도 그날 밤 이렇게 바다가 심하게 요동을 했어.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바다는 곧 자신의 뿌리였는데 바다를 성나게 하는 악마가 집안에 들어왔으니 자기는 뿌리가 흔들려 죽어가고 있다며 날 마구 때렸었어. 참다못해 법원에 입원시키자, 이상스럽게도 꼭 이런 날에 탈출을 해서…. (몸을 심하게 싸안으며) 그래, 네 말대로 면역이 생길 수는 없겠지.
딸-옛일을 상기시키려던 것은 아니였어요. 날씨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만.
어머니-이상하구나. 바다가 저렇게 성을 내는 것은 내 여지껏 본격이 없어. 정말 심상치 않은 날씨야.
딸-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절대 아무일 없을 거예요. 그때의 병원들은 해변에 있었지만 지금 가 계신 곳은 내륙지방이예요. 그곳에서는 파도의 움직임을 알아낼 수 없으실 거예요.
어머니-만약 탈출해서 돌아온다면 아마도… 날 죽이고야 말겠지.
딸-(어머니에게로 달려가서 손을 감싸주며) 그만 두세요. 제발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절대로 이번만은 그곳에 잘 계실 거예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그냥 조용히 이 밤을 넘기는 거예요. 어머니, 무서워요. 그런 눈빛 하지 말아요.
어머니-억센 간호원의 손길에 끌려가면서 날 저주하고 협박했다. 오, 질질 끌려가며 나를 노려보던 그 싸늘한 눈동자가 아른거리는구나.(침을 조심스레 삼키며) 오늘밤은 왜 그런지 기분이 좋지 않아. 그리고 나도 이젠 지쳤구. 날좀 꼬옥 껴안아다오. 몹시 몸이 떨리는구나.
딸-(어머니를 깊게 안아 주면서) 지금 당장 오빠를 서울로 올려 보내야해요.
어머니-무슨 말이지?
딸-오빠는 할 일이 있어 내려온 거래요.
어머니-할…일…?
딸-아까 절벽 끄트머리에서 같이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런 말을 했어요.『넌 자식이 제 아버지를 죽이려 맘을 먹었을 때 가장 보고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누군줄 아니? 바로 그 아버지란다. 그리고 그 얼굴이 떠오르면, 그 얼굴은 금방 눈물로 변해버리는 거야』
어머니-아니다. 그럴리가 없어. 그래서는 안돼. 네 아버지는 미친 사람이야. 제 정신을 가진 자식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생각한단 말이냐.
딸-오빠는 파도가 더 거세어지기를 기원하며 아버지의 탈출을 바다신께 기도 드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순간 저는, 오빠의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의 환상을 보았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탈출해 오는 것은 두렵지 않아요. 오빠가 중얼거리는 말들이 더 무서워요. 그것들은 살아서 꿈틀거렸어요. 온몸의 소름을 쭈욱 뽑아내는 말이었어요. 아버지가 도망쳐 오신다면 오빠는…아버지를…(말을 잇지 못하고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서 흐느낀다)제발…제발… 이 광란의 밤이…어서…지나갔으면.
어머니-(격하게 딸을 안아 주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서서히 괴고 천천히 볼 위로 흘러내린다) 그래, 아무일 없을 거야. 정말 그렇구말구. 내가 괜히 엉뚱한 생각을 해서 너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아요. 엄마가 생각했던 것은 그런게 아니야. 그저 이처럼 단조로운 생활에 염증이 나서 한마디 내뱉었을 뿐이야. 이제 그만 해라. 어서. 그만, 이제 그만. 이렇게 부탁하잖아.(딸이 천천히 어머니를 본다. 사이) 내일 아침 일찍 오빠를 서울로 올려 보내자꾸나. 괜찮지?
딸-(끄덕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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