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지는 일본인의 눈|숨통 튼 은수 200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흔히 한일 관계를 은수 2천년이라 부른다. 85년은 백제 박사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지 1천7백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은수 2천년이라 하지만 두 나라의 관계는 늘 우리가 베푸는 입장이었다. 한자문화뿐 아니라 나라의 제도, 입는 옷 등 오늘의 일본을 지탱하고 있는 문화·기술의 원형은 거의 모두가 한국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전한 것이다.
지금도 일본 전국 도처의 지명·역·사찰이름 등에 남아있는 백제·고려·신라라는 이름은 이를 입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늘 은혜를 원수로 갚아왔다. 고대사에서부터 계속 나타나는 왜구의 노략질이나 임진왜란, 그리고 지금도 응어리를 남기고 있는 일제 36년의 침략이 그것이다.
84년 9월6일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을 맞는 일본 천황의 발언은 일본이 과거 한일 관계사를 왜곡해 왔음을 시인하는 동시에 은혜를 원수로 갚아온 잘못을 사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새로 시작된 한일 관계의 원점은 아무래도 국교정상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한일 두 나라는 65년 6월21일 동경에서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12월18일 서울에서 비준서를 교환했다. 형식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한국으로서나 일본으로서나 전후처리의 종결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민간의 화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조약의 체결이 진정한 정상화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상화를 운운하면서도 20년이 가깝도록 두 나라가「가깝고도 먼 나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종전 후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기까지 20년간 일본인들은 어떤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는가부터 보자.
일본 언론계의 한 중견간부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들이 그 동안 36년 통치에 대한 반성이나 미안함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패전 직후에는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그 후 생활이 안정돼 가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국민이 무관심이었다.
당시 일본인들 중 한국에 관심을 가진 계층은 어민들과 한일 관계 개선에 반대하는 좌익세력 정도였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어민들은 평화선(일본인들은 이승만 라인이라 부른다) 이 생계와 직결돼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
한국의 이미지를 흐리는데 평화선에 대한 일본 정부의 비판적 자세나 매스컴의 집중 공격이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일본 경제신문의「다무라」외신부 차장은『한일 관계에서 과거 일부 일본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가 사실을 왜곡하고 한국의 참모습을 가려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하고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민간의 이해가 늦어진데 일본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했다.
정치지도자들의 대한관이라는 것도 일반대중의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국교 정상화 당시 산께이 신문의 특파원으로 서울에 근무했던 동해대의「하야시」교수는 이점에 대해『이른바 친한 인사들이라는 사람들일수록 과거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한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만 했다』고 말하고 있다.
국교정상화를 보는 식자들의 눈도 매우 비판적이다.
동양사 연구가로 한일 관계사에 밝은 무사시대의「와따나베」교수는 65년의 한일 기본조약 체결을 전후 종결을 위한「사무처리」로 규정하고『유·무상 5억 달러로 전후종결을 짓는다는 것은 일본으로서 그 이상 바랄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국민간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할 정상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고 했다.
동해대의「하야시」교수는『정부 레벨의 정상화였는지는 몰라도 국민을 포함한 국가 레벨의 정상화는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정상화의 긍정적 측면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당시 그런 식으로라도 관계성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한일관계의 개선은 더욱 늦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정권적 차원의 정상화가 오늘날과 갑은 역사전환의 계기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정치가의 결단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돼있다는 사정 때문에 외교적 선택이 어려웠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기본조약 체결 당시 대학생이었던 오오사까 이께다기따 고교의 역사담당 「와까바야시」(43) 교사는『남북이 갈린 상황에서 한국 한쪽과만 조약을 체결한다는데 의문을 가졌었으며, 따라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밝히고『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한반도 통일이 어려웠다는 사정 등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 일본인들의 대한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은, 따라서 일본인들의 북한을 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생기고 매스컴이 자세를 고쳤다는 얘기가 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