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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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방에 일이 있어 가는 길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걸려 온 오랜만의 전화였다. 반가운 마음에 서로의 안부와 근황부터 물었다. 어느덧 중년의 나이인데도 대화 속의 친구와 나는 여전히 여고생이었다. 대화가 끊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금세 이야기 거리가 떨어져버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둘 다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중학교 동창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은 옛날로 돌아가 있었지만, 대화의 끝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각자 현재의 삶에 푹 젖어 아무리 발버둥치며 과거로 돌아가려 해도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대개 가정을 꾸리고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경력을 제법 쌓은 직장인 친구도 있다. 나는 친구들의 예상대로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다. 그러니 우린 달라도 너무 달랐다.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은 채 친구의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친근감과 낯선 감정이 묘하게 교차했다. 아이의 얼굴 위에 친구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이 신기하고도 어색했다. 학창 시절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들이었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전혀 낯설 것 같지 않았는데, 그것은 나의 아름다운 착각이었다. 그런 기대와 착각은 오랜 세월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 것만으로 충분했나 보다.

그리운 이들과의 만남이 내게 준 가르침이 있다. 의미 있는 사람들을 잘 떠나보내라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감정을 내려놓으라고 말이다. 이 길을 가는 사람만의 속성일까. 아무리 중요한 인연이라도 시절이 지나면 어떤 형태로든 작별을 고하고야 마는 것, 그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인생을 물건으로 채운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가진 것에 비례해 만족감이나 행복감이 커지지 않는 것이다. 또 아는 사람이 많다고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전화기 속에 수많은 연락처가 저장돼 있어도 정작 자주 쓰는 번호는 열 개도 채 안 된다. 역시 삶이란 것이 가득 채운다고 채워지지 않는다는 말이 맞나 보다.

사람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고, 물건에 대한 욕심도 내려놓고 단순하고 무심하게 살리라 다짐한다. 사람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는 대신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하고,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대신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금방 죽을 줄 모르고 집을 짓는 노인에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자식이 있고 재물이 있는데도 공연히 어리석게 허덕이네. 나라고 하는 이 몸도 내 것이 아니거늘, 무엇 때문에 자식과 재물을 걱정하는가? 더울 때는 여기 머물고 추울 때는 저기 머물겠다고 미리 생각하면서, 정작 다가오는 재앙은 알지 못하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지혜롭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네.”

버리고 내려놓는 일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원영 스님 metta4u@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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