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삼성 탓, 삼성 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정재
논설위원

세계의 부자들은 질병에 관심이 많다. 질병은 바람이나 햇살처럼 만인에게 평등하다. 그중 전염병은 특히 무차별적이다. 부자라고 봐주거나 권력자라고 피해가지 않는다. 부자들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는 세균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평소 다른 사람과 악수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역시 세균 공포증 탓에 마스크와 장갑을 벗지 않았다. 빌 게이츠는 지난 5월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사람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보다 많지만 스페인 독감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며 “다음에 또 이 같은 전염병이 돌면 250일 이내에 3300만 명, 캐나다 인구와 맞먹는 사람이 죽어나갈 것”이라고 걱정했다.

막는 방법은 하나다. 전염병이 창궐하지 못하게 싹을 자르는 거다. 만인 앞에 평등하다지만 전염병은 사실상 가난병이기도 하다. 위생과 감염은 서로 상극이다. 내 가정, 직장, 내 나라의 위생을 높이는 것만이 내가 전염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다. 어디 내 나라뿐이랴.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엔 어느 외진 나라의 신종 전염병이 갑자기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 전 지구촌 단위의 방역이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부자들의 기부·자선이 전염병 퇴치에 쏠린 건 어제오늘이 아니다. 빌 게이츠가 대표적이다. 그는 최근 향후 5년간 전염병 백신 개발에 15억 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빌앤드멜린다게이츠재단’을 통해 SK케미컬에도 장티푸스 백신 임상시험에 쓰라며 490만 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빌 게이츠는 평소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를 주장해 왔다. 돈을 벌어 이익을 남기되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자본주의다. 질병 퇴치용 기부는 창조적 자본주의의 실천이기도 하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공동 창업자 폴 앨런도 에볼라 퇴치에 쓰라며 아프리카에 1억 달러를 쾌척했다. 마크 저커버그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25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반면 우리 대기업이나 부자들은 어떤가. 새 먹거리라며 바이오·제약에 대한 투자는 많이 하지만 질병·전염병 퇴치를 위한 지원·기부는 찾아보기 어렵다. 질병과 전염병을 돈 되는 사업으로만 볼 뿐 이를 막아내 대한민국 공동체를 안전하게 지켜내는 사회·공익적 접근은 아예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니 대기업·부자들의 기부·지원이 교육과 장학 사업같이 생색내기 좋은 쪽으로만 쏠리는 것 아닌가.

 국내 최대 기업 삼성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삼성은 새 먹거리로 바이오·제약을 택하고 집중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감염 질환을 막기 위한 공익적 노력은 없었다. 전염병을 다른 기업처럼 돈벌이로만 본 것이다. 국민 기업 삼성이라면 한 걸음 더 나갔어야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삼성서울병원은 여론의 집중 질타를 받았다. 야당 원내대표까지 나서 “과하다”고 말할 정도다. 급기야 지난주 사장단에 이어 그제는 이재용 부회장이 국민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 부회장은 “참담하다. 책임을 통감한다”며 “감염 질환을 막기 위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래 돌고 돌아 비로소 삼성이 큰 방향을 제대로 찾은 셈이다. 빌 게이츠 식으로 표현하면 “자본주의라는 ‘이기적 메커니즘’이 사회 전체를 위해 이타적으로 작동하도록 궤도를 수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삼성 탓’이 ‘삼성 덕’으로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삼성을 보는 시선은 두 갈래다. 삼성 덕, 또는 삼성 탓. 애(愛)와 증(憎)이 교차한다. ‘삼성 덕’은 쉽게 ‘삼성 탓’으로 바뀌지만 ‘삼성 탓’은 좀체 ‘삼성 덕’으로 바뀌지 않는다. ‘삼성 딜레마’의 근본이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의 6월을 장악한 이역(異域) 전염병 메르스는 그 삼성 딜레마를 정면으로 건드렸다. 지금은 ‘삼성 덕’이 아니라 ‘삼성 탓’에 갇힌 국민 시선을 더 따갑게 느껴야 할 때다. 물론 전염병 퇴치를 위한 삼성의 약속은 삼성딜레마의 통증을 줄여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완치까지는 더 오랜 시간과 더 많은 정성이 필요할 것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