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말뿐인 책임총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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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건 국무총리는 현 정부 1백일을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高총리는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앞으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여러 각오를 피력했다. 지난 1백일 동안 뒷짐을 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결과가 어떤 경위로 초래됐건 高총리는 2인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高총리로서는 말이 책임총리지 청와대가 세세한 구석까지 간여하고 결정해 버리는 바람에 설 자리가 없었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실제 정부 중앙청사 기자실의 이전 계획조차 언론보도를 통해 알았던 현실은 그의 처지가 어떠했는가를 잘 말해준다. 우리는 총리가 뒤늦게 화물연대의 집단행동에 대처하러 나섰다가 청와대 관계자의 독단적 결정으로 머쓱해했던 경우도 잘 알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의 책임이 면탈되지는 않는다. 청와대가 독주를 했건 안 했건 총리는 헌법상 내각을 이끌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NEIS를 둘러싼 교육계 전반의 혼란 등 잇따른 갈등상황에서 조정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운신의 폭이 좁았다는 것을 핑계로 일신의 안온이나 챙겼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책임총리는 고사하고 '얼굴 총리'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닌가.

그랬던 高총리가 국정현안 정책조정회의를 주2회 소집하고 국무위원 해임건의도 필요하면 반드시 하겠다니 다행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3급 공무원들과 직접 대화를 준비하는 등 국정운영 스타일이 갑자기 변할 것 같지도 않은 상태여서 총리의 의지가 얼마나 먹혀들지 의문이다.

또 해임건의를 실제로 보여주겠다면서도 말썽많은 교육부총리에 대해서는 발을 빼는 등 처음부터 미덥지 못하게 행동하고 있다. 입으로만 국정 주도를 얘기할 게 아니라 야당이 해임결의안을 제출할 예정인 만큼 총리가 먼저 해임건의를 하는 게 어떤가.

이로 인한 정국 경색도 차단하고 총리 위상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국정이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도록 하기 위해서도 총리 스스로 각성하고 분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