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푸르나』에 삶을 걸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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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영자가 드디어 해냈다.』김양이 4년째 살고있는 인천시구월동 주공아파트l54동102호 한태원씨(29·김양의 여동생남편) 집엔 김양어머니 박점옥씨 (62)를 비롯, 큰언니내외·동생내외·조카등 가족·친지 20여명이 등정소식을 듣고 달려와 서로 얼싸안고 김양의 쾌거를 축하했다.
어머니 박씨는『산이 좋아 결혼도 않고 산에만 다니더니 결국 큰일을 해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등반사에 또 하나의 세계기록을 추가한 김영자양은 1백56cm의 키에 45kg의 가냘픈 몸매. 그러나 우락부락한 산사나이들도 그녀를 『영자형』,『영자선배』로 부른다.
인천 인화여고시절 등산을 시작, 축산업협동조합 중앙회에 근무하면서부터는 산으로 시집간것처럼 열성을 보여 해외원정만 4차례나 기록했다. 77년이후 2년간 한국등산학교(교장 권행섭) 정규반과 암벽반을 거쳐 남자들만 회원으로 가입할수있는 전통을깨고 은벽산악회 멤버가 된 그녀는 각종 등반대회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나타냈다.
80년 애나푸르나원정을 시작한 은벽산악회에서 김양은 1차정찰대원으로 선발됐으며 이때 닐기리중앙봉(해발7천61m)의 제2캠프(해발5천4백m)까지 올라 고소적응훈련올 쌓았다.
지난해 9월 애나푸르나I봉 첫도전에서는 정상보다 1km 낮은 해발 7천50m의 제4캠프까지 올랐으나 눈사태로 대원 1명과 셰르파 2명이 숨지는 바람에 등정을 포기한채 하산했다.
올해 2차 원정에서 정상공격대원으로 선발된 그녀는 날렵한 몸매에 지구력 또한 뛰어나 천부적인 알피니스트체질을 갖추었으며 남자산악인들도 견디기 힘든 겨울철 장기훈련등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김양은 82년 첫 해외출정때 신비에 싸인 애나푸르나 정상을 본뒤 『애나푸르나야말로 내삶의 과제』라고 늘 말해왔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김양은 이때부터「생활이 곧 훈련」이라며 매일아침 10여km씩 조깅을했고 전철을 타고있을때는 한쪽팔 손잡이에 몸을 완전히 매달리고, 버스에서는 발앞꿈치로만 서는등 체력단련에 열중했다.
재학시절 미술과 무용에 재능을보여 요즘도 틈틈이 스케치·판화를 즐겨한다.
해외출정비 5백여만원올 마련하기위해 김양은 은행·회사에서 대부도 받고 몇달치 월급도 가불했으며 평소에도 월급·보너스는 몽땅 등산비용으로 써왔다.
김양은 1남6녀중 셋째로 성격은 과묵하고 외곬으로 고집이 세며 타협을 몰라 가까운 친구는 2∼3명뿐.
김양의 방엔 웅장한 애나푸르나봉 사진(세로30cm, 가로2백cm)이 방안을 지키고있고 책장안엔『저! 히말라야』(손경석 저)『다울라기리의 북쪽』등 산에 관한 책이 1백여권이나 차곡차곡 꽂혀있어 산에 대한 평소 집념을 말해주었다.
동생 명숙씨는『환송때 무사히 성공하고 돌아오라고하니까 언니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무표정하게 떠났지만 두눈엔 굳은 각오가 역력했었다』고 말했다.
김양은 떠날때『일기장·등반일지·앨범등을 몽땅 두고가니 혹 내가 못돌아오거든 전기나 한번 써달라』고 유언 비슷한 말을 했다고. <인천=김정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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