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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초의선사 茶法, 우리에게 전해준 대흥사 승려 응송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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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호 26면

1 필자(오른쪽)가 스승 응송에게 차를 드리는 모습. 2 대흥사 입구에 위치했던 백화사.
3 김후신의 ‘삼선전약’ 지본담채. 신선들은 차를 불로초로 여겼다. (간송미술관 소장).

응송 박영희(應松 朴暎熙·1893~1990)는 전남 해남의 대흥사 승려다. 초의선사가 완성한 ‘초의차’의 격조 높은 다법(茶法·제다법과 탕법)을 후세에 전했다. 그의 속성은 박씨이며 완도 서망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영희이고 포길과 학규라는 아명을 썼다. 법명은 응송이고 호는 매다옹(賣茶翁),일주(一舟)였다.

<25·끝> 전통 茶法의 계승

 총기가 남달랐던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완도 향교에서 『소학』『논어』 등 유가서(儒家書)를 익혔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농한기를 틈타 ‘철글’을 익혔다. 농사철에는 집안일을 거들고 농한기를 틈타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자서전』은 자신의 삶의 여정을 여과 없이 써내려간 개인의 역사서다. 황준성 스승은 그에게 애국과 독립정신을 심어 줬다. 응송은 조선 말 정미년(1907)에 군대해산령에 불복한 죄로 유배된 스승을 완도 향교에서 만났다. 황준성은 무관출신이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듯하다. 그가 나라를 근심하며 토해낸 장탄식은 하늘을 울렸고 응송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응송은 평생 항일정신과 독립 의지를 품고 살았다.

항일 의병 황준성 권유 받아 출가
응송의 인생 여정을 가름하는 사건은 청소년기에 참여했던 대흥사 심적암에서의 항일의병 전투였다. 일경(日警)과의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황준성과 응송은 신분이 노출되어 일경의 눈을 피해 친척집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황 스승은 응송에게 출가를 권하며 후일을 기약한다. 스승의 말씀을 따라 응송은 출가를 결심한 후 대흥사의 인담(印潭)에게 나아가 사미계를 받는다. 출가 후에도 늘 황 선생의 안부가 궁금해 은밀히 수소문해 보니 그는 이미 사형에 처해졌다는 말을 들었다. 겨우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수행에 정진하는 한편 원응(圓應·1856~1927)에게 『능엄경(楞嚴經)』『기신론(起信論)』『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 등을 배웠다. 그의 법사였던 원응은 범해(梵海·1820~1896)의 제자다. 해남 녹산방(鹿山坊) 사람으로 어려서 영호(靈湖)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범해에게서 배웠다. 후일 그는 초의선사의 묵적(墨籍)을 수습하여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와 『초의시고(草衣詩藁)』를 간행하여 스승의 뜻을 세상에 드러냈다. 특히 범해는 원래 호의(縞衣)의 제자이지만 초의에게 대승계(大乘戒)를 받았다. 그도 초의처럼 차를 즐긴 아름다운 정취를 수많은 다시(茶詩)에 드러냈으니 이들의 다풍은 응송에게 전승되었던 셈이다.

 응송은 신교육을 받았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과학적인 신교육을 통해 유신해야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에 각 사찰은 공비생(公費生)을 선발,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대흥사에서도 사비(寺費) 장학생을 선발했는데 응송이 그 기회를 얻어 중앙학림에 입학했다. 그러나 어렵게 얻은 학업의 기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일경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겨우 6개월 간 군사훈련을 마친 후 일본군 토벌대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귀국해 대흥사로 돌아온다.

백화사에서 본격적인 차 연구 시작
잠시 대흥사에서 설립한 장춘보통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28년 혜화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였다. 당시 혜화전문에는 정인보·김영수·박한영 등 국내 최고의 기라성 같은 석학들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불교학자이며 수행승이었던 박한영은 독립에 대한 열의를 품었던 응송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스승이었다. 후일 대흥사 주지시절 응송은 인멸된 초의의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 음기(陰記· 비석의 뒷면에 쓰는 글)를 박한영이 썼다. 혜화전문 시절 응송은 만해 한용운이 조직한 불교 독립운동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원으로도 활약했다.

 그가 차를 알게 된 것은 다각(茶角·차를 내는 일을 맡은 소임자)시절(1911~1914년경)이다. 본격적인 차의 연구는 백화사에서 시작했다. 그가 다각으로 차를 내던 정황은 근·현대기의 다풍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정보이다. 그는 『동다정통고(東茶正統考)』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만일 사중(寺中)에 손님이 오면 어른 스님께서 차를 준비해 오라고 하셨다. 부엌에는 늘 숯불이 준비되어 있었고 천정에 연결된 도르래 끝에 V자형으로 만든 나무에 주전자를 매달아 놓았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차를 한줌 넣어 푸르르 소리가 나면 얼른 도르래를 올려 뜨거운 차를 따라 손님에게 가지고 갔다.”

 당시 사원의 차 살림은 그리 넉넉하질 않았던 듯하다. 귀한 손님이 와야 차를 대접했는데 차를 다리는 방법이 지금과는 달랐다.

 이런 탕법은 소치(小癡)의 ‘추사난화도’에서 드러난 탕법과 일맥상통하므로 당시 차를 다리는 물의 온도는 뜨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차를 조사했던 모로오카 다모쓰와 이에이리 가오즈가 쓴 『조선의 차와 선』 에도 “차를 누렇게 될 때까지 뭉근한 불에 구워서 탕관의 물속에 하나 또는 둘, 셋을 넣고 달이면 탕관 속에 끓는 물이 진한 찻빛이 되므로 이때 차 주발에 따라 마신다”고 하였다. 이런 다법은 일제 강점기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차는 성질이 차가와 뜨겁게 마시는 것”
필자가 백화사 시절에 본 응송은 주로 잎차를 만들어 즐겼다. 물론 응송의 제다법은 초의의 제다법과 동일하다. 그리고 늘 뜨거운 차를 즐겼다. 생전에 그는 세상에 잘못 알려진 탕법의 모순을 지적하며 “차는 성질이 찬 것이어서 뜨겁게 마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뜨겁게 마셔야하는 탕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그는 ‘일탕법’으로 차를 우렸다. 뜨거운 물로 다관을 세척한 다음 차를 넣고 뜨것운 물을 붓는다. 잠시 후 찻잔에 차를 따르는 방법인데 재탕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30초 내외에서 차를 우려 뜨겁게 마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탕법은 카페인을 최소화하고, 맑고 싱그러운 생기(生氣)를 침출하기 위함이었다.

 응송은 불교정화이후 대흥사 주지에서 물러나 백화사 작은 암자에서 차를 즐기며 수행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때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영산홍과 자산홍이 나의 작은 정원에서 철따라 꽃 피는 것을 보곤하였다.”

 그가 가꾼 정원은 인근의 멋을 아는 사람들이 간간이 찾아오는 운림이었다. 특히 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붉은 영산홍이 만들어내는 절경은 차와 하나 되는 일경(一景)을 만든다. 응송은 “간혹 나를 찾아 백화사를 방문하는 객에겐 차를 대접하며 초의스님이 차를 연구하고 만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차를 나누며 담소하는 일은 나의 작은 소일거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 “산거(山居)의 소박한 일상은 참으로 소박하고 한가로웠다. 참선하는 여가에 초의스님의 선리와 차를 연구하였다”고 했으니 그의 일생에서 참선의 묘미를 일상화했던 시기였다.

담양·진도서 차 구해 제다법 되살려
대흥사에는 차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분지(盆地)였기에 겨울엔 추워서 차가 자랄 수 없었다. 응송은 “차철이 되면 다각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대흥사 인근이나 강진·진도·담양 등 야생차가 자라는 곳에서 차를 따다가 초의 스님이 전해 준 제다법대로 차를 만들곤 하였다”고 했다.

 “천주(千株)나 되는 소나무 아래에서 명월을 벗 삼아 벽금설(碧禽舌·작설차)을 달여 마시는 운치란 대단한 것이었다. 옛 사람의 말처럼 ‘한 잔의 춘설이 제호(醍醐)보다 좋다’라는 음다의 경지를 체득했던 때였다.”

 수행의 여가에 차를 즐기는 멋을 표현한 대목이다. 백화사 시절 그는 『동다송』『다신전』『사변만어』를 연구하며 초의가 전해준 다도의 진면목을 체화하려 하였다. ‘여동춘양끽다가(與東春孃喫茶歌)’엔 그의 일상이 이렇게 표현돼 있다.

 (새로) 떠온 물로 차를 다려 서로 반쯤을 마시니(汲水點茶互半飮)
 몸과 마음 상쾌하여 하늘에 오를 듯(心身快然如昇天)
 나는 백을, 저(필자 동춘)는 흑을 잡고 바둑을 두는데(我白彼黑鬪戱碁)
 혹 이기거나 지더라도 조용히 웃음을 지을 뿐(或勝或敗閑失笑)

 다른 시에선 “소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시니(松下一甌茶)/ 차와 내가 모두 한 몸이라(茶我同一體)”고 하였다. 이는 초의의 ‘차와 물을 나누지 말라’던 불이선(不二禪)의 경지를 이은 것이다.

 근·현대로 이어지는 변혁기에 시대의 아픔을 감내했던 응송의 충심은 그의 저서 『동다정통고』와 미간본 『선학연구』와 『인도철학개요』『자서전』 등에 오롯이 드러난다. 그의 정성스런 손끝에서 피어난 다삼매(茶三昧)의 정수는 초의로부터 범해로, 그리고 원응으로부터 전해진 것이었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성균관대 겸임교수. 저서로는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사송』 『추사와 초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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