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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일 관계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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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석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전 외무부 아주국장

한·일 관계가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고들 걱정한다. 그렇지는 않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과 그 다음 해 문세광 사건 당시에는 국교 단절까지도 언급될 정도였다. 문세광 사건은 친북 재일동포 문세광이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를 저격·살해한 일이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양국은 지금 가까운 이웃이다. 양국 간에는 매년 500만 명의 인적 왕래와 900억 달러의 교역이 이루어진다. 일본은 한국의 세 번째 교역 상대국이고, 한국이 생산하는 주요 공산품의 핵심 부품을 제공하고 있다. 한류 연예인이 일본에서 환영받고, 서울 거리엔 일식음식점이 즐비하다.

 인접한 이웃 국가 간에는 통상·어업·문화·이민·마약 단속 등 어떠한 문제라도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현명한 이웃이라면 이견과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잘 찾아내야 한다. 수백 년간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던 프랑스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협력 관계를 발전시킨 사례는 본받을 만하다.

 현재의 한·일 관계가 악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한·일 간 국력 격차가 크게 줄었다. 50년 전엔 20배 이상 차이였는데 지금은 3.4배다. 1인당 국민소득으로 보면 1.4배 차이다. 냉전 체제 해체 전후 한국은 북방 정책을 추구하여 대륙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킴으로써 정치·경제적 입지가 편해졌다. 반면 일본은 90년 이래 장기 정체를 겪었다. 특히 2010년 중국 경제에 추월당한 이후 일본 내에서는 국제적 위상 저하에 따른 조바심이 커졌다. 이에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십분 활용해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중심 역할을 자임하고 정상국가화를 지향하면서 국민적 사기를 높이려 하고 있다.

 그런 배경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한·일 관계는 너무 꼬여버렸다. 2005년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자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렸다. 내용 자체는 한국인이 쉽게 공감하는 것이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설 일은 아니었다. 양국 간에 전쟁이 일어날 사태가 아니라면 외교부의 과장이나 국장이 항의해도 된다. 대통령이 한·일 외교의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면서 직접 나선 목적은 한·일 관계의 문제 해결보다는 국내 정치 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한국 사회를 친일과 반일로 양분해서 소수 지지 기반을 확대하려 한 것이다.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건국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그 시도는 효과를 보았다. 한국 사회는 반일과 친일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낙마 과정에서도 이 잘못된 프레임이 작용했다. 반대자들이 ‘친일 역사관’이라는 구도로 문 후보자를 몰아붙인 것이다.

 아베 총리는 무리하게 과거사를 왜곡하는 우경화 정책을 주도하고 A급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를 적극 참배하고 있다. 이 역시 한·일 관계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다. 양국의 정치지도자가 외교상의 금도를 일탈하는 행위는 양국의 선린과 공동 번영을 향한 길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아베 총리의 의도를 읽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일본의 손을 덥석 잡을 수는 없다. 한국 사회의 반발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사에 대한 박 대통령의 엄중한 태도는 아베 총리의 우경화 시도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한·일 관계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지 않았다. 다만 한국 사회의 반일·친일 양분 구도에서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세적인 대응을 한 셈이다. 이제 한·일 간 외교 교섭을 정상적 관행으로 되돌리자는 정치적 제안을 할 시기가 되었다.

 최근 양국이 과거사와 현안을 구분해 경제·안보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다행이다. 양국은 국민적 교류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과거사 문제에만 묶여 다른 현안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 이런 합리적 ‘구분의 흐름’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양국의 지도자가 양국 간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걸 중단하는 것이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기본 입장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원칙은 지키되 상황을 악화시키는 정치적 의도는 자제하라는 것이다. 한·일 간 외교 교섭을 정상적 단계로 되돌리고 지도자는 높은 위치에서 방향 설정과 지휘·감독을 하면 된다. 그러면 국민적 차원의 교류와 통상을 통해 양국 관계는 순조롭게 발전할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침착하게 관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국인들이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일본 제국주의의 과오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한국 사회는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용인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세계 여론이 결국 진실을 밝혀낼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그리고 진실은 연착(延着)하는 열차다. 늦어도 반드시 온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과 전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는 모든 일이 진실로 귀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석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전 외무부 아주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