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 노다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사금 노다지 소동이 한창이다. 22개의 사업장이 서고 50여 채금업자가 작업인부 2백여명을 동원해서 금을 캐느라고 법석이다.
장소는 전북김제군금구면. 금구는 말 그대로 황금의 개천이란 뜻이다. 예부터 금이 많이 난 곳으로 알러져 있다. 그 금구벌이 사금 러시를 이루고 있다.
벌써 1930년대에 일제가 화차로 금모래를 실어 날랐던 「폐광」이다.
사금은 암우 속에 들어 있던 금이 오랜 세월을 지나 비바람에 씻겨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가다 모래에 스며 층을 이룬 것이다.
「골드 러시」는 1848년 카우보이 「보브·마크」가 엘 패소금광을 발견했던 시대 이래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그때 콜로라도의 모래땅 한촌은 일거에 인구 5만명의 도시로 변모했었다. 미국 서부개척의 도화선이 된것은 물론이다.
고승제의 『한국경영사연구』에는 1930년대 우리나라 5대광산이 소계되고 있다.
그중 금은광산은 고동광산과 미국자본인 동양합금업회사의 운산금광이 최대규모였다.
한때 폐광이던 삭주 다릿골에서 금을 찾아내 도광한뒤 편금을 만들어 직접 서울의 일본 관헌의 허가를 받은 금도매상 덕력에다 팔았던 일은 유명한 얘기다.
귀성출신 광산왕 최창학이 삼성광산으로 일약 떼부자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노다지를 캐내 벼락부자가 된 그는 해방 당시 2천6백만원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그때 환을 달러당 2원으로 쳐서 1천3백만달러나 된다.
홍경래의 난이 서북지역 가산의 다복동을 근거로 한것은 실은 금때문이다. 흉년에 장정 동원이 쉬웠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금이 해외에 소개된것은 이미 신라때 아라비아 사람들은 신라를 황금국으로 불렀다.
서양에 조선 금광을 널리 선전한건 조선조 고종때 「코체」다. 운산금광이 미국인에게, 수안금광이 영국인에게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다. 서구인이나 일본인들이 우리의 금을 노린 싸움도 그로써 비롯됐다. 「노다지」란 말도 실은『노터치』(손대지말라) 라는 영어의 소산이다. 편금 혹은 금괴상자에 외국인·금광주들이 그런 말을 썼음직하다.
금구벌의 때아닌 사금노다지는 이권을 쫓는 각박한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러나 한편 이 시대에도 떼돈을 버는 어수룩한 구석이 설마있을까. 황금 낭만은 옛날 얘기일 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