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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셰프, 스펙 가리고 손맛만으로 뽑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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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16일 롯데호텔서울 2층 연회주방에서 응시자들이 요리를 하고 있다. 학력·어학성적 등 스펙을 보지 않고 에세이와 요리능력만 평가한다. [사진 롯데호텔]

“훈제 연어로 에피타이저를 만듭니다. 최대한 창의적으로 만들어 주세요.”

 16일 오전 9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2층 연회주방은 긴장감이 가득했다.남대현 셰프의 지시와 함께 하얀색 가운을 입은 9명의 청년이 일사분란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신입 셰프 실기시험이 열린 이날 출제된 요리 주제는 훈제연어 에피타이저와 가자미 생선요리, 양 갈비 요리 등 3가지다.

 이번 셰프 공채는 롯데호텔이 처음 도입한 ‘무(無) 스펙’ 전형으로 치러졌다. 본래 롯데호텔의 신입 셰프 입사자는 국제대회 수상자나 타 호텔 등에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응시원서에 자기소개서(에세이)와 이름·연락처 등 기본적인 인적사항만 적게 했다. 롯데호텔 인사팀에서도 “사전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면접과 실기만으로 지원자의 모든 면을 평가해야 한다는 점이 걱정됐다”고 밝혔을 정도다.

 하지만 지원자들의 열정과 요리 실력은 그동안 공채 그 이상이었다. 지원자 중 홍일점인 한태희(24·여·우송대 외식조리학 4년)씨는 미래 호텔 요리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밝혔다. 한씨는 “앞으로의 먹거리 트렌드는 간편하게 집에서 해먹는 간편가정식(HMR)과 ‘3분 요리’ 같은 레토르트 식품이 양분하게 될 것”이라며 “호텔 음식의 갈 방향은 ▶소중한 사람 ▶중요한 자리 ▶가치있는 음식 등 3가지라고 본다”고 말했다.

 시험은 숙련된 셰프가 치르기에도 어려웠다. 세계 3대 요리학교인 CIA(미국요리학교)를 졸업해 캘리포니아 퓨전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했던 고수현(29)씨도 이날 시험에서 가자미 때문에 허를 찔렸다. 고씨는 “대형마트에서 사는 가자미는 손질이 되어 있거나 뼈째 구워먹는 경우가 많은데, 생 가자미를 비늘·머리부터 손질해야 해 당황했다”고 말했다. 이날 시험에서는 ‘레시피 카드’도 도입됐다. 어떤 재료를 얼마만큼 사용해 어떻게 조리할지를 적어야 한다. 레시피 카드와 실제 요리가 다른 경우에는 감점된다. 선발 예상인원은 2~3명이지만 절대평가 방식이라 0명이 될 수도, 4명 넘게 뽑힐 수도 있다.

 이번 셰프 채용은 롯데호텔이 맨해튼 더팰리스호텔을 인수한 이후 첫 공채라 ‘맨해튼 1기’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병우 롯데호텔서울 총주방장(상무)은 “입사한 요리사 중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은 맨해튼에도 적극 배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롯데그룹은 14개 계열사에서 총 100명의 신입사원을 무스펙 채용인 ‘스펙태클’ 전형으로 선발한다. 롯데홈쇼핑에서는 ‘홈쇼핑에 최적화된 테마 프로그램을 기획하라’는 시험 문제가 나왔다. 롯데주류에서는 ‘당사 제품 중 하나를 골라 어떤 시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판매를 늘릴지 영업 전략을 기획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롯데그룹에서 시작된 ‘무스펙 채용 실험’은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능력 중심 채용모델’ 확산을 위해 기업들에게 직무 중심 입사지원서를 개발해 주고, 필기시험 직무적성검사를 출제해 주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최근 학점·자격증 등을 보던 채용 방식을 ‘직무 능력’ 위주로 바꿨다. 모두투어도 영어점수·학점 중심의 서류전형에서 발권·영업·콜센터관리 등 직무별로 입사지원서를 달리했다.

 박종갑 대한상의 자격평가사업단장은 “올 하반기부터 주요 대기업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직무능력 평가가 더욱 강화될 전망”이라며 “청년 구직자들을 위해서 스펙 거품을 걷어내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현택 기자 mdfh@joog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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