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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한국의 모델상 바꾼 ‘못생긴 톱 모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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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해외파 패션모델 김동수

혜화동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타 신관 2층 강당에서 김동수 교수가 포즈를 취했다. 이곳은 학교 측이 김동수의 업적을 기리며 ‘김동수 강의실’로 이름을 붙인 곳이다.

‘못생긴 모델’ 김동수(58). 그는 발리·페레 등 유명 해외 디자이너의 컬렉션에 선 첫 한국 모델이었다. 모델 출신 첫 스타 강사였고, 4년제 대학 모델과의 1호 교수였다. 한국 모델 역사를 쓴 김동수는 아직도 “모델에 대한 선입견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할 일이 많다”고 했다.

세계가 인정한 동양의 아름다운 얼굴

“안녕하세요. 못생긴 톱 모델 김동수입니다.”

 김동수는 늘 이렇게 인사를 했다. 못생긴 톱 모델이라니.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모델이 자신의 이름 앞에 ‘못생긴’이란 말을 붙인다는 게 의아하다. 왜 그럴까.

 그가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80년대 중반은 얼굴 예쁜 모델들이 주로 활동하던 때였다. 당시 실린 그에 대한 신문 기사의 제목은 ‘앗, 저렇게 못생긴 모델이 있었나. 앗, 저렇게 테크닉이 좋은 모델이 있었나’였다.

 “난 그게 너무 웃겼어요. 어릴 때 형제 중에 인물이 못났단 얘긴 들었지만 나 스스로 못생겼다는 생각은 안 해봤거든요. 그리고 해외에선 하도 ‘아름답다’란 칭찬을 받아왔던 터라 그 기사를 보고 한국 정서가 세계와 참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죠.”

 그때만 해도 한국에선 개성이란 걸 인정해주지 않았다. 무조건 인형처럼 예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세계의 많은 디자이너와 일하면서 개성 있는 제 외모로 최고의 대우를 받았죠. 한국에서 ‘못생겼다’고 말하는 얼굴을 ‘내 상품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남 4녀의 넷째, 딸로는 셋째 딸이었던 그는 어렸을 땐 집안의 ‘미운 오리 새끼’였다. 언니·오빠·여동생 모두 키가 크고 인물이 좋았다. 언니는 수재 소리를 들을 만큼 공부를 잘했고, 오빠는 유명 농구선수였다. “형제 중에 제 인물이 제일 빠졌어요. 그래도 기죽진 않았어요. 워낙 언니, 오빠가 잘나서 당연한 거로 생각했죠.”

80년대 한국에선 개성을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못생긴 톱 모델로 절 상품화시키기로 생각했죠
왜 성형만 하려고 하나요 제발 개성을 찾으세요

1990년대 후반 찍은 의류 광고(左), 2009년 잡지 ‘얼루어’에서 ‘50대에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뽑혀 찍은 화보(右)

모델, 자긍심 없인 못할 일

80년대 귀국길에 가져온 컴포지트 카드. 축소판 포트폴리오로 키, 신체 사이즈, 눈동자색 등이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써있었다.

김동수는 78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했다. 미국에 간 지 1년 만에 모델로 데뷔했다. 한 흑인 모델이 큰 키의 김동수를 보고 “너 모델이니?”라고 물은 게 시작이었다. 호기심에 나간 미국 모델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자마자 프랑스 파리로 캐스팅됐다. 그 후론 영국·이탈리아·스위스·스페인·모나코·미국을 다니며 활동했다. 당시 해외에는 한국인을 찾기 힘들었다. “매일 ‘여기서 울면 지는 거다’라고 되뇌었어요.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죠.” 언어 콤플렉스도 컸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당당해야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해야 했다. 그게 실력이자 경쟁력이었다.

 그는 어떤 직업보다도 화려해 보이는 패션모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긍심”이라고 했다. “오디션에서 거절당하는 거요? 그건 모델에게 수없이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걸 견디지 못하고 좌절하면 모델이 될 수 없어요.” 그는 얼마나 거절당했는지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도전했다.

 “난 어설픈 게 제일 싫어요. 그래서 가장 싫어하는 음식도 어설픈 퓨전 음식이에요. 값만 비싸고 맛없는 정체불명의 요리는 싫어요. 모델도 똑같아요. 편견 많은 직업이지만 직업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자긍심이 없으면 정체불명이 돼요. 모델이란 직업은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건데, 그렇다면 확실하게 해야죠. 후회하지 않게요.”

 그 시절 김동수를 본 외국인들은 모두 “차이니즈? 재패니즈?”라고 물었다.

 “외국에선 한국을 잘 몰랐어요. 일본에서는 이세이 미야키, 겐조 같은 디자이너가 모델과 함께 미국·유럽에 진출해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이란 말을 들으며 활동했지만 우린 한국 사람 한번 만나기도 어려웠죠. 그래도 세계 여러 곳에서 몇 년 동안 이구동성으로 ‘너 참 아름답다’란 말을 계속 듣다 보니 ‘나에게 정말 뭔가 있구나’ 했어요.”

앙드레김에게도 굽히지 않은 ‘내 포즈’

80년대 초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모습.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건 85년이었다. 그해 패션쇼에 참석하려 스위스에 갔던 어느 날 저녁 차창 밖으로 ‘고려정’이란 간판이 눈에 띄었다. “한국에 대해 생각할 겨를 없이 일에만 몰두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고려정이란 간판을 보자마자 한국이 그리워지더라고요.” 그날 저녁 쇼가 끝나고 혼자 고려정에 들러 비빔밥과 육개장을 시켜 먹었다. “그때 웨이트리스가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인형같이 너무 예뻤어요.”

 처음엔 그저 “한국의 가을 하늘이 보고 싶어서” 짧은 여행을 하러 왔다. 한국에 온 그는 앙드레김을 찾아갔다. 그날 마침 앙드레김 매장에는 가수 패티김이 놀러와 있었다고 한다. “앙드레김보다 패티김을 가까이에서 본 게 더 두근거렸어요. 두 분이 영어 반, 한국어 반으로 대화를 나누는 게 재미있었어요.” 유럽에서 활동한 포트폴리오를 내밀자 앙드레김은 큰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무대에 서달라고 했다.

 하지만 김동수는 앙드레김 쇼에는 딱 한 번밖에 못 섰다.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앙드레김 선생님은 쇼에서 빙글빙글 도는 걸 많이 시키는데 전 그게 싫었어요. 옷을 표현하는데 내 방식이 더 나아 보였죠. 그래서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내 포즈를 취했는데, 당시 무대 뒤에서 제 모습을 본 선생님이 엄청나게 화를 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뒤로는 앙드레김의 패션쇼엔 못 섰다. 하지만 대회 심사위원이나 외부 행사 자리에서 마주치면 앙드레김은 김동수에게 “세계적인 마들(모델)”이라고 부르며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김동수 이후 한국의 모델상은 달라졌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모델들은 170cm 정도의 키에 큰 눈과 오뚝한 코를 가진 예쁜 얼굴의 모델들뿐이었다. 175cm의 키에 바람에 날리는 듯한 커트 머리를 하고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는 모델 김동수는 당시 한국 모델들 사이에는 충격이었다. 게다가 너무 당당하고 뻔뻔하기까지 했다. 방송과 강의에 나와서 하고 싶은 얘길 거침없이 했다. “돈 많이 안 들여도 멋 낼 수 있다. 왜 성형수술만 하려고 하냐. 하더라도 헤어나 메이크업으로 먼저 변화를 줘 본 후에 해라. 제발 개성을 찾아라”라고 말했다.

 그의 등장 이후 한국 모델들의 키가 175cm 이상이 됐다. 개성 있는 얼굴도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못생긴 모델’ 김동수의 얼굴은 ‘세계가 인정하는 동양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이 됐다.

 89년에 해외여행 자율화가 되면서 워킹이나 표현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 김동수가 한국에서 처음 보여준 크로스워킹(X자로 발을 교차하며 걷는 워킹)이 대중화됐다. “제가 특강을 하면 학생들뿐 아니라 현역 모델들이 뒤에서 보고 몰래 따라 했대요. 그렇게 걸으면 역동적이고 몸 라인이 강조되거든요. 지금요? 지금은 각자의 개성이 더 중요해서 워킹도 다양해졌죠. 신체 비율만 좋으면 키는 작아도 되고요. 감성이 더 중요해진 거죠.”

교수·스타강사로 모델 선입견 바꾸다

88년 미국 곡물회사 ‘카길’의 한국 지사장이던 남편과 결혼했다. 하지만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야 하는 남편의 직업 때문에 떨어져 있는 날이 많았다. 남편은 “당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 사회적으로도 너무 아까운 일”이라며 김동수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지금도 그의 가족은 미국에서 지낸다. 얼마 전 버클리대 정치학을 전공한 아들 안드레 진 코퀴야드(24)는 한국 럭비 국가대표선수가 돼 한국에 들어왔다.

 90년대는 김동수의 해였다. 책 『성공하는 남자의 옷 입기』 『못생긴 톱 모델 김동수의 차밍스쿨』 등을 썼다. ‘개성을 찾으라’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각종 매체와 기업의 러브콜을 받는 ‘스타 강사’가 됐다. MBC 아침 교양프로그램 ‘생방송 새아침’의 보조 MC로도 캐스팅돼 국내에서는 모델로는 처음으로 방송 MC가 됐다.

 이후 패션 컨설팅 회사를 차려 이미지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교수가 된 건 98년 당시 동덕여대 총장의 요청 때문이었다. 모델과를 만들 예정인데 초대 교수가 돼 달라고 했다. 당시 전남과학대에 2년제 모델과가 있었지만 4년제 대학엔 모델 관련 과가 전무했던 상황이었다. 김동수는 총장에게 “모델을 하는데 4년제 대학에 다닐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총장은 "여성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실용예술학문은 꼭 필요하다”고 답했다. 김동수는 총장의 대답을 듣고 그 자리에서 오케이를 했다. 그리고 17년째 이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누구나 인생에 가지고 가는 화두가 있다. 그는 나이가 들며 그 나이에 맞는 모습은 뭘까를 생각했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니 모델 아닌 ‘여자 김동수’가 중요해지더라고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해주며 베푸는 걸 보고 자라왔는데 저는 뭘 누구와 나눠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제 머릿속엔 모델에 대한 생각, 일에 대한 생각뿐이었죠. 이젠 좀 달라져야죠.”

 그는 최근 패션모델의 위상이 달라진 게 반갑다. 유명 모델인 한혜진·강승현·이현이는 방송가를 누비고 있고 모델 출신으로 배우가 된 김우빈·차승원은 요즘 핫한 한국의 남성상이 됐다. 김동수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모델이란 직업에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고 그는 그게 이상했다. 외국에서는 모델이 아름다움의 최일선에 있는 직업으로 칭송받았는데 한국에서는 ‘키가 너무 커’라든지 ‘공부를 안 했을 거야’라는 식으로만 평가하는 게 섭섭했다. 그는 “모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꾸기 위해 학교에 있는 건데 요즘 모델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고 했다.

 김동수는 스스로 후배 모델들의 본보기가 되고 싶다. “나의 모습이 곧 후배들의 롤모델이 되지 않겠어요. 그걸 생각하면 아름답게 살고, 잘하려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

글=윤경희 기자 annie@joogn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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