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5)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08)-『소년』잡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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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무렵에 춘원은 정주 오산학교에서 선생노릇을 하고있었는데 자주 서울에 올라와 육당의 『소년』 편집일을 도와주었다. 신문관 숙직실에서 자고 먹고하면서 글을 써주었고, 산같이 모여드는 독자의 투고를 골라 고선도 해주었다. 여름이면 육당부인은 춘원의 옷을 빨아 다리미에 다려 내보기도했다고한다. 춘원은 동경있을때 벽초와 육당의 권고로 「톨스토이」 의 소설을 탐독해 박애주의자가 되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동정한다고 조부가 권하는 동네처너 백환순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새부인과 뜻이 안맞아 서울 올라와 육당한테 그 고민을 하소연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이부인과는 이혼하고 말았는데 그 몸에서 신근이란 아들이 태어났다. 이 신근이 해방전까지 가끔 서울에 올라와 며칠씩 묵고 돈을 타가지고 정주로 내려갔다고 한다.
육당이 아무리 부지런하다고 하여도 혼자서 매월 『소년』잡지 한권을 꾸며내기에는 너무나 힘이 벅찼다. 그래서 춘원이 많이 거들어온 것인데 육당은 잡지 편집뿐 아나라 인쇄에 쓸 용지를 사들여오는 일로부터 인쇄기계에 쓰는 잉크, 그밖에 여러가지 물품을 사오느라 잡지가 나오면 책사에 넘겨주는일 등등, 하나에서 열까지 혼자서 일을 해나가야하였으므로 여간 바쁘지 않았다.
그때 그의 목장은 어땠는고하니 점병 모자라고하는 커다란 캡을 쓰고 두루마기를 반쯤 접어 새끼줄로 중간을 동여매고 미투리를 신고 자전거를 타고 비호감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비호」 란 말은 호랑이가 날아다니듯 날쌔게 빨리 다닌다는 뜻인데, 그 당시에 많이 쓰던 말이다.
그때 육당의 이 모습을 눈여겨보아온 양백화의 말을 들으면 그 육중한 몸으로 어떻게 자전거를 잘 타는지 장교나 굽은다리 (곡교) 천변 좁은 길을 아슬아슬하게 회돌아 다니더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두루마기 허리를 동여매고 미투리에 캡을 쓰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것이 기관일것이지만 그때는 이것이 심상한 모습이었을는지 몰랐다. 이렇게 육당은 『소년』 잡지의 사장이오, 편집장이오, 집필자요,영업서기요, 사환이기도 하였던것이다.
이런식으로 억척스럽게 잡지를 만들어 4번이나 끌었고 『소년』이 페간된후에 김여제라는 신인을 얻어 다시 『붉은 저고리』를 윌2회 발간하였다. 김여제는 춘원이 정주 오산학교에서 가르친 학생중에 제일 수재였던 사람으로 춘원의 추천으로 서울에 울라와 신문관에서 숙식하면서 새잡지일을 보았다. 1912년 7월에 『붉은 저고리』 제1호률 냈는데 지형은 타볼로이드판 8면이었다. 내용은 『소년』 과 비슷하였고 김여제가 많이 거들어 한결 육당의 힘이 덜 들었다고한다.
『붉은 저고리』 는 한달에 두번씩 발간됐는데 한번도 압수를 당하는일이 없었지만 l6호까지 낸 다음에 총독부의 명령으로 발간이 정지되었다. 1913년 6윌의 일이었다.
『붉은 저고리』 가 페간된 뒤에 최남선은 김여제를 동경으로 유학시키고 뒤따라 육당자신도 동경으로 갔다. 동경에는 임 규라고하는 육당의 선배가 살고 있었는데 그의 부인은 일녀였다.
임규는 나중 3·l운동때 최남선이 독립선언서 이외에 일본내각과 중의원 귀족원에 보내는『조선독립에 대한 의견서』 를 작성해 그 의견서를 가지고 3월1일 이전에 동경에 도착하도록 일본에 보낸 사람이다. 임 규는 이 의견서를 동경에서 우편으로 부치고 귀국하다가 동경역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1913년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6년전의 일인데 그때 최남선은 동경에 셋집을 한채 얻어 임 규부처를 살게하고 김여제도 그 집에서 숙식하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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