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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과 도피, 세기말 욕망에 불 댕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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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호 14면

마티스의 ‘생의 기쁨 Le bonheur de vivre’(1905-1906).

“그대는 내 열정을 알지
자줏빛으로 벌써 익은
석류는 저마다 벌어지고
꿀벌들로 잉잉거리고”
“오! 끝에 남은 것이란
나 혼자 애타게 그린 장밋빛 과오.”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13>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와 마티스의 ‘생의 기쁨’

1906년 마티스(1869~1954)는 ‘생의 기쁨’이라는 달착지근한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그때 그의 삶이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 제목은 그랬다. 남보다 늦게 시작해서, 여전히 가난한 화가였던 마티스에게 처음 주어진 평은 잔혹했다. 1905년 가을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야수같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야수파’의 리더로 인정을 받았지만, 머리 위에 씌워진 것은 조롱과 몰이해의 왕관이었다.

당시 마티스는 삶이 행복했다기보다 삶을 행복한 것으로 바꾸어버리는데 성공했다. 삶의 여러 군데가 삐걱거리고 있지만, 적어도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캔버스 위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그는 군침이 도는 주황색, 오렌지색, 레몬색을 캔버스 위에 잔뜩 올렸다. 그 위에 초록색, 라벤더 색 같은 감미로운 색을 토핑, 삶을 달콤새콤한 기쁨에 찬 무엇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원근법의 규약과 관습을 잊은 낙원의 공간. 감미로운 관능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 제멋대로 자리를 잡았다.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여인은 홀로 피리를 불고 있고, 더러는 서로 얼싸 안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 양손을 목 뒤로 올린 여인은 고혹적인 자세를 뽐낸다. 화면 한가운데 멀리는 기쁨에 도취된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원무를 추고 있다. 인물들은 모두 자족적이고 자기 도취적인 행복감에 젖어있는 가운데, 그림은 전체적으로 기묘하게 초연한 관능을 발산하고 있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은 두 편의 시, 즉 보들레르(1821~1867)의 ‘여행으로의 초대’와 말라르메(1842~1898)의 ‘목신의 오후’에서 영감을 받았다. 마티스는 보들레르의 시와 관련해서 1905년에 이미 ‘호사, 고요, 쾌락’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보들레르의 시는 연인에게 현실의 때묻은 삶에서 벗어나 이상세계로 달아나자는 달콤한 속삭임이자 약속이다. 그 세계를 채우는 자족적인 감정의 이름이 ‘호사, 고요, 쾌락’였다. ‘생의 기쁨’에서는 그런 감정이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마티스는 한 걸음 더 말라르메에게로 다가간다.

황금만능주의에 염증 느낀 사람을 위한 헌사
“아! 님프들의 모습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하는 한탄과 함께 말라르메의 시는 시작된다. 나른한 오후, 깜빡 단잠에 빠져든 목신은 꿈을 꾼다. 그의 꿈에는 요정, 사랑, 관능이 있었다. 특히 마티스의 그림 한가운데, 마주 보고 누워있는 두 누드는 전형적인 ‘누워있는 비너스’의 자세를 하고 있다. 말라르메가 “당신의 터무니 없는 욕망의 백일몽”이라고 표현했던 두 님프를, 그 옆에 피리를 불며 걸어가는 소년은 목신을 연상시킨다.

“그대는 내 열정을 알지/자줏빛으로 벌써 익은/
석류는 저마다 벌어지고 /꿀벌들로 잉잉거리고”

이 시구처럼 목신의 사랑은 감각의 총동원이다. 그것은 시각(색)으로 말하자면 자줏빛이고, 후각으로 말하자면 석류의 농익은 냄새며, 미각으로 말하자면 새콤달콤하다. 또 촉각으로 말하자면 촉촉하고, 청각으로 말하자면 꿀벌들이 잉잉거리며 나는 소리처럼 조급하다. 그렇게 욕망에 달뜬 그가 님프들에게 달려드는 순간, 그만 잠이 깬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하고, 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감미로웠다. 이제 남은 것은 목신의 한탄뿐.

“오! 끝에 남은 것이란
나 혼자 애타게 그린 장밋빛 과오.”

그러나 과오라도 ‘장밋빛’이라면, 그것도 괜찮은 것이다! 말라르메의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아름다움이 다른 가치에 앞서는 시대, 아름다움을 위해 다른 가치를 포기하던 19세기 말 데카당스의 시대였다.

시인 말라르메는 은둔자이자, 시인을 위한 시인, 예술가를 위한 예술가였다. 평생을 중학교 영어선생으로 조용히 살았지만, 그의 시들은 조금씩 퍼져 나가 추종자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주변에는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시대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끔찍한 물질의 시대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술로의 도피였다.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한 예술가가 바로 ‘신비한 꿈의 왕자’라는 별명을 가진 말라르메였다.

피로를 풀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예술
모든 것이 덧없이 지나가는 시대에 대한 시인의 처방은 ‘더디게 읽고 깊게 생각하라’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의 상투적인 어법을 벗어나 언어와 사물의 순수한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 고통이 우리를 성장시키듯, 고통스러운 예술(난해한 예술)만이 우리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진입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말라르메를 맛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상식에 기대는 예술은 맥 빠진 밍밍한 것이 되고 만다.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는 하나의 발원지가 되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문화를 흥건히 적셨다. 음악에서는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의 전주곡’이 탄생했고, 무용에서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발레리노 니진스키의 전위적인 발레가 됐다. 그리고 마티스의 그림이 됐다. 이들은 각기 고유한 어법과 독창성을 가진 비교 불가능한 예술작품들이다.

‘생의 기쁨’은 『목신의 오후』가 가지고 있던 관능성과 도피의 욕망을 더욱 감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말라르메의 시대가 데카당스의 시대였다면, 마티스의 시대는 신선한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종합과 일보진전이 이루어지던 아방가르드의 시대였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은 지금까지 그려진 모든 여성 누드들의 여러 요소들을 총동원한 종합판이며, 새롭고도 낙천적인 확장판이다. 감미롭고, 유혹적인 여성 누드들이 반복해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욕망이 도무지 식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는 영원한 갈망의 상태로 남아있다는 말이다.

두뇌 거치지 않고 감각에 호소하는 방식 창안
마티스의 그림, 이곳은 설명할 수 없는 색채의 나무가 자라는 낙원, 비현실의 공간이다. 현실에서의 누드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포르노그래피가 될 뿐이었다. 관능적인 누드는 비현실의 영역에 머물 때만 아름다울 수 있다. 마티스는 가짜 낙원을 사실적으로 그려서 눈 앞에 보여주는 대신, 낙원의 감각을 즉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두뇌를 거치지 않고 감각에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창안해 냈다.

머리로 보면, 이 그림은 엉터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마티스의 그림 앞에서는 ‘실제로는 이렇다’라는 상투적인 생각은 내려놓아야 한다. 대신 달콤새콤하게 채색된 오렌지 색, 레몬 색, 라벤더 색, 초록 색의 감미로운 흐름과 조화에 몸을 맡기면 된다.

마티스가 꿈꾸는 예술은 “균형과 순수와 청아함의 예술”, “모든 정신 노동자를 위한 진정작용, 심적 위안물, 육체적 피로를 풀 수 있는 편안한 안락의자 같은 예술”이었다. 마티스의 낙원은 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존재하는 그림 속에, 우리 눈 앞에 있다. 삶이 구제할 수 없이 지리멸렬해질 때 이런 예술이 갑자기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위대한 미술책』『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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