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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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정국(1955~) '망명' 부분

녹슨 수도관에 귀를 기울여
벌판 끝의
먼 물소리 듣고 있어,
그 갈망의
끊어지는 순간들을 이어 붙여
꿈결처럼 이어 붙여
당신께 이를 수 있다면

당신, 내가 바라볼수록
깊어지는 바다
가까스로
사람의 몸으로
온몸이 바다인 당신께 투항할 수 있다면



빌딩과 벽과 창문 속에서 녹슨 수도관에 귀를 기울여 벌판 끝의 먼 물소리를 들으려는 이 자는 누구인가? 갈망의 순간을 이어붙여 보겠다고? 제법 간절해 보이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 그는, 아직도 그 먼 물소리의 주인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어. 게다가 자신이 온전한 '사람의 몸'이 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해. 다시는 '망명'을 꿈꿀 수 없게, 다시는 바다를 볼 수 없게, 그를 현란한 빌딩으로 에워싸 버리겠어!

박덕규<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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