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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Outdoor] 진달래 키스에 달뜬 영취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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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면

열린 차창으로 넘어오는 바람 끝이 뭉툭해졌다. 어디론가 떠나기 좋은 날씨다. 때맞춰 산하는 꽃 잔치가 한창이다.

동백.매화.벚꽃.산수유.개나리.진달래…. 시차를 두고 순서대로 피어야 할 꽃들이 한꺼번에 와락 쏟아져 나왔다.

올해 유난히 오래 간 꽃샘추위 때문이다. 시간의 질서만 헝클어진 것이 아니라 공간의 질서도 무너졌다. 남녘에서 북쪽까지

서서히 올라와야 할 꽃들의 물결이 순식간에 질주하니 개화예상도는 쓸모없게 돼 버렸다. 덕분에 어디로 차를 몰아도 눈부신 꽃 잔치를 볼 수 있으니 개탄할 일은 아닐 것이다. 자꾸만 들뜨는 마음을 추스르며 남도로 차를 몰았다.

다섯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여수반도 중턱의 영취산. 봄 산행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여수=최현철 기자<chdck@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봄 물 오르는 산

이른 봄의 산은 탱탱하다. 모든 것이 부풀어 터질 것 같다. 흙은 흙대로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숨을 가득 들이마신 허파처럼 부풀고, 나무는 가지마다 땅속의 물을 잔뜩 끌어올려 눈깔사탕 가득 문 볼때기처럼 도독하다. 안이 부풀면 거죽은 얇아진다. 얇아진 거죽으로 빛이 통과한다. 갑옷처럼 두껍고 딱딱한 겨울 산과 달리 봄의 산은 투명하고 반짝인다.

투명한 것들은 일정한 색조를 띤다. 어떤 것은 푸르고 어떤 것은 붉다. 안쪽의 색깔이다. 하지만 거죽을 통과하면서 채도를 뺏긴 탓인지 온전한 제 색깔은 아니다. 해서 멀리서 본 봄 산은 아스라하다.

거죽이 부풀다 한계에 이르면 틈이 벌어진다. 그 틈을 비집고 잎과 꽃이 나온다. 한창 봄 물이 오르고 있는 영취산도 드디어 거죽이 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틈새로 어린 싹들이 머리를 내민다. 어린 싹의 생김은 톱니를 닮았다. 산자락에 무성한 물오리나무의 새잎도 그렇고 밑동이 베어진 억새의 새 순도 그렇다.

아무리 얇아졌다지만 겨울을 버텨온 거죽을 뚫으려면 그 정도의 무기는 갖춰야 하나 보다. 멀리서 찾아온 상춘객을 맞이하는 영취산의 초입은 그렇게 어리지만 야무진 생명력의 향연으로 풍성했다.

◆ 천상정원

사실 영취산은 그다지 매력적인 산은 아니다. 웅장하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 최고봉인 진례봉의 높이가 510m에 불과하다. 아이와 함께 올라도 서너 시간이면 산행을 마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다. 그래도 이맘때쯤이면 작은 산이 사람으로 미어진다. 산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 군락을 보기 위해서다. 사실 진달래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지표식물이다. 그래서 진달래가 무성한 산은 건강하지 않다. 영취산도 토양이 급격히 산성화되고 있다고 한다. 공해 때문에 영취산 자락에 산재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이주를 서두르고 있다. 그 산이 피워내는 마지막 절규가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니 자연의 역설은 본디 그러한가 보다.

산행은 여천공단에서 남해화학 방향으로 가다가 GS칼텍스(옛 LG정유) 맞은편으로 난 임도에서 시작한다. 임도 가기 전 흥국사나 건너편 상암동에서 시작하는 코스도 있지만 진달래 군락을 감상하기엔 이 길이 좋다. 임도를 3㎞ 정도 걷다 골명재에서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든다. 10분쯤 억새 무성한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산자락부터 드문드문 보이던 진달래가 덤불로 다가선다. 사람 키보다 더 높은 진달래들이 아예 터널을 이루고 있다. 가지 끝마다 예닐곱 개씩 매달린 꽃봉오리들이 모두 피면 자체로 커다란 꽃송이 하나가 된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봉오리는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듯 꽃보다 더 벌겋다. 하늘거리는 꽃잎 수억 개가 뭉치니 연분홍 색감은 선홍으로 전이한다. 그 안에 들어서면 나무도 붉고 꽃도 붉고 틈새로 보이는 하늘도 붉고 사람의 마음도 붉어진다. 누가 진달래를 수줍은 꽃이라 했을까? 사람의 마음을 달뜨게 하는 진달래는 정열의 꽃이다.

내쳐 450m봉 정상까지 오르면 각각 개체로 보이던 진달래가 물결로 일렁인다. 동북능선을 따라 다른 나무 없이 진달래로만 덮인 골명재 군락지는 초록의 방해를 받지 않아 붉은 융단을 깐 듯하다. 붉은 능선 끝은 광양만의 푸른 물결로 이어진다. 진달래 군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450m봉을 넘어 진례봉 정상으로 가는 길에도 흐드러지고 그 넘어 도솔암 아래 봉우재에도 만만치 않은 규모의 군락이 있다. 그래서 흥국사까지 이어지는 두어 시간 남짓의 산행길은 천상 정원으로 나들이 길이다.

◆ 불교 미술관

영취산은 고대 인도 마가다국에 있는 차타산을 일컫는 지명이다. 석가모니가 7년간 법화경을 설법했다는 산이다. 여수의 영취산은 여기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차명의 연유는 산 아래 흥국사까지 내려와야 느낄 수 있다.

봉우재에서 서쪽으로 길을 잡아 다소 팍팍한 계단길을 내려가면 흥국사에 이른다.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다는 이 절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수군이 진주했던 까닭에 호국도량으로 유명하다. 가람 한 쪽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의 친필 현판도 있다.

흥국사의 진수는 탱화에 있다. 건물 자체가 보물(396호)인 대웅전에는 석가여래의 영취산 법회를 그린 후불탱화(보물 578호)가 있고 원통전 관음탱화와 응징전 16나한 탱화도 보물이다. 전시관에는 12m짜리 괘불이 걸려 있다. 지상 2층에서 지하 1층까지 내리 걸린 석가모니는 1층으로 들어선 방문객들을 가슴으로 맞는다. 위로 아래로 시선이 움직이는 괘적을 따라 방문객들의 입도 저절로 벌어진다. 다른 어느 절에서도 만날 수 없는 불교 미술관의 압권이다. 뒷산의 진달래와 절집의 탱화만으로도 영취산은 사람을 끌 만한 매력이 충분한 산이다.

*** 여행정보

호남고속도로 순천IC는 곧장 17번 국도로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여천공단이 나올 무렵 흥국사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한다. 흥국사를 지나는 길은 영취산을 휘돌아 상암까지 이어진다. 17번 국도를 따라 돌산대교를 건너 돌산도 끝까지 가면 4대 관음기도도량 중 하나인 향일암이 나온다. 이름에 걸맞게 이곳의 일출은 손꼽히는 장관이다. 돌산대교는 우뚝 솟은 다리 기둥을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물들이는 조명이 아름다운 곳. 다리 건너 돌산 공원이 감상 포인트다. 무성한 동백나무 숲 사이로 산책로가 잘 꾸며진 오동도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바다에 면한 여수는 싱싱한 해산물이 많지만 정작 유명한 것은 돌산 갓김치다. 특유의 매콤한 향과 톡 쏘는 맛이 봄철 입맛을 돋운다. 여수 어느 식당에서든 갓김치가 등장하지만 향일암 초입에 갓김치 식당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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