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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150>|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튼튼한 재정과 우수한 기자를 망라하였으므로 이를 활용하여 조선에서 제일가는 신문을 만들려고 하몽은 주야로 고심하였다. 조선일보가 민중의 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민중을 즐겁게 해주는 취미와 실익을 겸한 읽을거리를 장만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는 연재만화에 착안하였다. 미국의 뉴욕 타임즈와 일본의 조일신문에도 연재만화가 있어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렇게 해 우리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낸 것이 유명한 연재만화『멍텅구리』였다. 멍텅구리와 애인「옥매」, 뚜장이「윤바람」과의 사이에 일어나는 탈선과 실패와 애환을 당시의 세태에 비춰 풍자한 이 만화는 조선에서 처음보는 재미있는 만화였던만큼 독자들의 갈채가 굉장하였다.
멍텅구리란 말이 이때부터 유행해서 세상일에 어둡고 똑똑지못한 사람, 어리석고 고지식하고 잘속는 사람, 이런 사람을 멍텅구리라고 불렀다. 이 만화는 한 편이 4개의 장면으로 되었는데 기승전결의 원칙에 따라 처리되었다. 이상협이 아이디어를 내고 심산 노수현화백이 그려 서울장안에는 한때 멍텅구리 붐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지금도 60대사람들은 그때의 멍텅구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연재만화를 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둔 조선일보는 다음으로 사회면과 같은 비중으로 가정면을 신실하고 여성기자를 뽑았다. 유명한 최은희가 그때 조선일보에 입사한 우리나라 여기자의 제1호였다.
최은희는 천성이 신문기자 타이프여서 놀라운 활약을 보여 우리나라의 여기자상을 정립시컸다. 여성난·가정난을 다채롭게 꾸며 부녀자의 계몽에 힘썼고, 여성구락부를 만들어 가정 살림살이에 틀어박힌 주부들에게 전매청·전화국·방송국 등을 구경시키고, 여자정구대회 유치원연합운동회 등을 개최해 여성을 사회로 끌어내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기를 끈것은 변장 탐방기자 노릇에 남자기자를 제쳐놓고 성공한 것이었다.
그때 조선일보는 일반민중과 신문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기위해 기자들을 갖가지 직업인으로 변장시켜 시내를 배회하게 하고 독자들이 이를 찾아내도록 하였다.
첫번째로 사회부기자 이서구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나갔다가 하루만에 발견되었고, 리어카꾼으로 변장한 손영극기자, 빵장수로 변장한 김달광기자가 하루만에 발견되었지만 남장의 행랑아범으로 변장하여 애를 업고 나간 최은희는 나흘동안이나 시내를 배회했지만 들키지 않았다. 이것이 그때 큰 화제거리였다.
다음은 최초로 해외특파원을 보낸 것인데, 그때 소련은 혁명을 치른지 얼마안되는 수수께끼의 나라였다.
이 궁금한 나라의 실정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 이상협은 때마침 일노조약이 북경에서 성립되어 교통이 열린 것을 알고 김준연을 소련에 특파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준연은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5년동안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 유학하여 유럽사정에 능통한 적임자였다.이리하여 25년 2월20일 김준연은 시베리아철도로 모스크바로 향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동아일보사에서도 어느틈에 준비를 하였는지,「김준연이 출발한 사흘뒤인 2월23일 일성 이관용을 모스크바에 특파하였다. 이관용은 구왕실의 종친이고 한일합방때 합방문서에 도장을 찍은 자작 이재곤의 아들인데, 독일에 오래 유학해서 철학박사 학위를 얻은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소련에서 돌아와 『현대평논』을 창간하였고, 신간회의 간부로 활약하다가 32년 여름 청진앞바다에서 수영중 익사하였다. 김준연은 귀국한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고, 해방후에는 한민당의 간부로 법무장관까지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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