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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따라잡기] Vatican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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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장례식이 세계적 관심 속에 거행되면서 바티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교황이 살고 일하고 또 죽어서 묻히는 바티칸은 세계 최소국이다. 시(市)에 불과한 나라(國)이기에 바티칸시국이라 불린다. 로마 시내 북서쪽에 12만평 규모로 자리잡고 있으며, 상주 인구는 1000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의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는 바티칸시국이 사실은 11억 세계 가톨릭의 정신적 고향이자 현실적인 교회권력의 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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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베드로의 무덤 터

바티칸은 고대 로마 시절 도심에서 벗어난 테베레강 건너편의 공터였다. 네로 황제 시절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성 베드로가 여기에 묻히면서 가톨릭의 성지가 됐다. 정확히 베드로가 묻혔는지는 불확실하지만 4세기초 콘스탄티아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한 직후 이곳에 대성당을 건축한 것으로 미뤄 일찍부터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여겨졌음은 분명하다. 20세기초 발굴조사에서도 늙고 골격이 굵은 노인의 유해가 일부 부장품과 함께 나와 신빙성을 더했다.

◆ 예루살렘 등과 주도권 다퉈

바티칸이 성 베드로의 무덤이기에 교황은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 불린다. 4세기까지만 해도 교황은 세계 주요 교구의 하나인 로마의 주교에 불과했다. 당시 5대 교구(로마/예루살렘/알렉산드리아/안티옥/콘스탄티노플)간에 벌어진 주도권 다툼에서 로마는 성 베드로의 후계라는 점을 강조해 세계 가톨릭의 중심 자리를 확보했다. 성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지상 대리인이기에 그의 후계임을 주장하는 로마 주교는 다른 주교들보다 높은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후 바티칸은 곧 교황을 의미했다. 한때 교황이 이탈리아 중북부 일대를 교황령으로 다스린 적도 있으나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되면서 교황령을 모두 상실했다.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의 모호한 관계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 비오 11세 간에 라테라노 조약이 맺어져 현재의 바티칸시국이 주권국가로 확정됐다.

◆ 시스티나 성당의 밀실 회의

바티칸의 중심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현재의 대성당은 1506년 율리우스 2세 교황이 '세계 최고의 건물'로 신축을 명령해 만든 바로크 양식이다. 120년에 걸쳐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건축비가 모자라 면죄부를 판매하는 바람에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성당의 웅장한 돔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 대성당 전면의 광장은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한 284개의 열주로 웅장하다. 광장 오른편에 교황이 거주하는 교황궁이 있고, 교황궁과 대성당을 연결하는 건물이 교황의 개인 예배당인 시스티나 성당이다. 시스티나 성당은 미켈란젤로의 걸작 '최후의 심판'이란 천장화로 유명하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추기경들의 밀실회의)도 이곳에서 열린다.

◆ 교황이 왕이라면 추기경은 왕자

교황이 3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 추기경 20명 내외가 주요 보직을 맡아 교황을 보좌한다. 교황이 왕이라면 추기경은 왕자로 불린다. 교황의 공식업무를 보좌하고 대리하는 2인자는 국무장관이다. 각 부처와 같은 기능을 하는 9개의 성(省)이 있으며 각 책임자는 추기경들이다. 가장 중요한 곳이 신앙교리성이다. 사법권은 3개의 법원(Tribunal)이 담당한다. 주로 교회법에 따라 혼인의 성사 여부를 결정하거나 교리에 대한 이견이나 도전을 심판한다. 이밖에 교황에 자문하는 각종 평의회, 개인업무를 챙기는 비서실 등이 있다.

◆ 한해 1000억 유로 적자

재정은 바티칸 은행에서 담당한다. 원칙적으로 각국 가톨릭 신도들이 내는 '베드로 헌금'이 재원이다. 늘 모자란다. 2003년 헌금액은 5580만 달러에 불과했다. 유력자의 목돈 헌금과 바티칸 내 시설 임대 수입, 관광수입, 우표.동전 판매, 자체 금융투자 수익 등이 주 수입원이다. 2003년 세입은 2억360만 유로, 세출은 2억1300만 유로. 약 1000억 유로 적자다. 바티칸이 보유한 문화재와 각종 건축물 등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

◆ 스위스 근위병 철통 경비

1506년 율리우스 2세 교황이 스위스 근위병 100여 명을 초대해 교황궁 경비를 맡긴 이래로 지금까지 스위스 용병들이 경비업무를 맡고 있다. 빨강.노랑.파랑 등의 화려한 근위대 복장은 속설과 달리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게 아니라 1914년 베네딕토 교황이 바티칸의 전속 재봉사에게 디자인을 주문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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