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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8)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8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물론 그들은 이런 사실이 없다고 극구 부인했지만 이제부터는 계엄사령부에서 군대를 보내 조선인에 대한 박해를 방지시키고, 지금까지 각 경찰서에 수용하여 보호중인 무고한 조선사람을 되도록 빨리 석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때 각 경찰서는 학살을 피해 온 조선사람으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것은 일본사람들의 조선사람에 대한 학살이 너무 잔인하고 처참하였으므로 잘못하면 국제문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한 일본정부가 갑자기 보호정책을 쓴 때문이었다.
이상협은 일본경찰을 따라다니면서 각 경찰서에 보호중인 조선사람을 석방시켰다. 이때 풀려나온 조선사람은 이상협을 구세주를 만난듯이 반가와 했으며 그때 우리들이 믿고 의지할 곳은 신문사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고 당시의 이재동포가 쓴 글을 본일이 있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이재동포의 위문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그때동아일보는 송진우가 사장이었다. 초대 사장이던 박영효는 창간한지 얼마 안되는 5월 권덕규가 집필한 논설 『가명인두상에 가일봉』때문에 유림이 반대 궐기하여 사태가 험악하게 되자 사장직에서 물러났고,김성수가 제2대 사장에 취임하였다가 송진우가 만기 출옥하자 21년11월 제3대 사장에 취임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24년 봄 박춘금이라는 악질 친일파가 동경에서 서울에 나타났다. 총독부 경무국장 구산학길이 불러온 것이었다. 박춘금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의 착취기관인 상애회라는 단체의 두목이었는데, 툭하면 권총을 빼들고 협박 공갈하기를 일삼는 악당이었다.
박춘금은 어느날 동아일보의 송진우사장과 주주대표인 김성수를 요리집 식도원으로 초청, 권총으로 협박하면서 동아일보가 배일사상을 고취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협박하였다. 그때 두 사람이 박춘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박춘금은 이틀동안이나 두사람을 감금하고 밖에 내보내지 않았다.
이때에는 총독의 고문인 아부충가의 알선으로 식도원에서 풀려 나왔지만 다음에 또 한번 박춘금은 송진우를 다른 요리집으로 유인해 해외동포 위문금속에서 10만원을 상애회에 주겠다는 승낙서를 쓰라고 강요하였다. 그때 송진우는 안 썼다고 하고 박춘금은 썼다고 해서 어느 쪽이 정말인지 모르지만, 이것이 동아일보 사원간에 문제가 되어 이상협대 송진우의 싸움으로 번져갔다.
동아일보 창간때 송진우는 옥중에 있었고, 출감하여 사장에 취임하였지만 그는 신문에 대해 별지식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문에 관한한 이상협은 송사장을 인정하지 않아 대소사에서 사장과 편집국장 사이에 의견충돌이 잦았다. 송진우가 마음이 깊고 정치가적인데가 있는데 비해 이상협은 성품이 양성인데다가 신경이 날카로와 참지를 못하는 사람이였다. 그러므로 두사람은 성격상으로 도저히 화합할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김성수와 송진우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싸움에서 어느 편이 패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상협은 박춘금문제로 사회의 여론이 분분해지자 지금이야말로 송진우와 헤어질 때라고 생각하였다. 이래서 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동아일보를 떠났다. 이것이 24년4월의 일이었다.
그때 이상협과 함께 동아일보를 퇴진한 사람은 모두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신구범전무를 비롯하여 홍증식영업국장·민태원정치부장·유광렬사회부장·김형원지방부장·김동성조사부장·김양수논설반장·최익진공장장·최영목정리부장 외에 평기자로 이서구·노수현·서승효등 대부분의 창간동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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