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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R&D 정책 바꿔야 히든 챔피언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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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노부호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지금 한국 경제가 당면한 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 창출일 것이다. 일자리 창출은 소득증대, 양극화 해소뿐만 아니라 사회통합과 같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와도 직결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일자리 창출에는 기업의 경쟁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기업이 경쟁력을 가져야 고용을 유지하고 확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정·금융 등 거시정책을 강조하고 벤처창업 활성화 정책을 통해 일자리 창출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대목은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미시적 접근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기업이 경쟁력을 가져야 내부로부터 벤처가 파생되어 나올 가능성도 커진다. 창업을 위해서도 기업경쟁력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우리 기업들의 수익성과 생산성이 아주 낮아졌다는 것이다. 세계 금융위기와 같은 외부의 충격이 다시 발생한다면 안심할 수 없는 수준이다.

 우리나라 상장기업의 30% 이상이 이자보상배율이 1이 안 된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다는 의미이고, 이대로 가면 생존조차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영업이익률도 한국 기업 평균이 5%인데 미국 기업은 15%다. 생산성 역시 거칠게 말하면 미국의 2분의 1, 일본의 3분의 2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수익성과 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경영수준이 낮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경영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 하기에 따라 한국 기업의 성장 잠재력이 높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려면 기술개발, 인재양성, 기업문화의 측면에서 대대적인 경영관행의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지금 전국경제인연합회나 상공회의소에서는 중소기업 경영자문단을 두고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배가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중간관리자에서 최고경영자에 이르는 모든 관리자들이 경영의 문제를 놓고 강의도 듣고 토론도 하면서 경영 문제를 전방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전국적 범위의 경영혁신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한지, 우리 회사는 각 요소에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상하 간에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런 위기의식이 작동되지 않으면 우리 기업들의 의식과 관행이 바뀌기 어렵다. 이에 덧붙여,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도 변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는 신용등급을 낮추어 대출받기 어렵게 하고 이자도 높게 하여 변화의 압력을 가해야 할 것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 기업의 경영관행을 조사한 여러 보고서들에 따르면 한국의 중소·중견기업은 인재양성과 기술개발에 기초한 틈새전략으로 세계시장에서 승부를 거는 노력이 부족하다. 우리가 소위 ‘히든챔피언’이라고 하는 틈새시장에서 세계 1~3위를 하는 강소·강중기업의 수를 보면 독일과 일본에 비해 크게 뒤지고 대만보다도 그 수가 적다. 한국이 독일과 같은 제조 강국이 되려면 대기업을 받쳐주는 허리가 되는 기술집약적인 강소·강중기업의 수가 많아야 한다.

 강소·강중기업의 수를 늘려 나가려면 정부의 연구개발(R&D) 자금을 강소·강중기업을 키우는 데 집중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R&D 정책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최근 여러 언론매체들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R&D 자금의 비중은 세계에서 1위인데 그 효과는 별로라는 보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자금 집행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면서 정부의 R&D 자금이 줄줄 새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런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정부 R&D 자금을 민간에 보조금 형태로 배분하는 관행부터 바꿔야 한다. 앞으로 정부 R&D 자금은 무기개발이나 우주항공연구와 같은 국가 과제 연구나 기초연구에 집중 투자하되, 그 외에는 정부가 직접 벤처투자자로 변신해 향후 가능성이 높은 기술 개발 프로젝트에 돈을 넣은 뒤 그 결실을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부가 좋은 벤처투자자로 변신하려면 이스라엘의 수석과학관실과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 이런 조직에 기술·경영 및 투자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유망한 기술 개발 프로젝트를 발굴해 투자할 뿐만 아니라 그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도록 모든 진행과정에서 각종 자문을 제공하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맡겨야 한다. 필요할 경우 정부의 관련기관이나 연구소들과도 연계시켜 줘야 할 것이다.

 우리가 참고해야 할 대표적인 사례가 이스라엘의 요즈마 펀드다. 요즈마 펀드처럼 기술개발을 통해 강소·강중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소기업을 발굴해 정부 차원에서 과감히 투자하는 것과 동시에 전 과정에 걸쳐 지원하고, 나중에 성공하면 배당이나 로열티를 받음으로써 성과를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한 걸음 더 나아가 R&D 자금의 자체 증식도 기대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벤처 육성과 기업의 경쟁력 제고, 그리고 일자리 창출의 선순환을 위해서도 정부의 R&D 자금이 지금처럼 보조금 형태로 배분돼선 안 된다.

노부호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