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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마음 적신 글, 글, 글 … 25년째 아날로그 SNS 역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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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호 12면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내걸린 글판 앞을 지나는 아버지와 아들. 시인·소설가·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광화문 글판 문안 선정위원회’가 글을 엄선한다. [사진 교보생명]

오늘날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웬만하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채팅 앱 하나쯤은 쓰는 시대가 됐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동시에 여러 명과 메시지를 공유하는 것도 용이해졌다. 하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란 말이 실감나듯 다양한 디지털 매체의 홍수 속에서도 ‘소통의 부재’란 말이 과거에 비해 유난히 많이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 아이콘 된 교보빌딩 ‘광화문글판’

『공감의 시대』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은 공감하는 인간을 ‘호모엠파티쿠스’라고 했다. 인간은 타인과 공감하는 존재이고 21세기는 이 같은 인간의 공감 본능이 이끌어 가는 ‘공감의 시대’라고 예견한 바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우리 청소년들은 메시지를 보내면 기계가 답하는 스마트폰, 소위 ‘가짜 톡’ 앱을 통해 가상 친구로부터 위로를 받는게 현실이기도 하다.

서울 도서관 외벽에 내걸린 글판.

이런 가운데 기업체나 공공기관 건물의 외벽에 큼지막하게 내걸리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옥외 글판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특히 서울을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광화문 교보빌딩의 ‘광화문글판’이 지난 27일 25주년을 맞았다. 도심 한가운데 기업체 건물 외벽에 내걸려 25년 동안 시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한 글판은 독특한 소통매체로서 의미를 더해왔다.

“광화문글판의 글을 보면 가슴에 따뜻함이 전해지면서 갑자기 힘이 솟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한 시민의 말처럼 광화문글판은 문화적 상징으로 성장했다. 지자체의 관공서나 도서관·박물관, 그리고 기업체들이 건물 외벽에 광화문글판과 유사한 글판을 앞다퉈 내거는 걸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광화문글판이 주는 매력은 어디에서 올까. 첫 번째는 진정성 기반의 공감적 가치를 들 수 있다. 누군가와 소통할 때 타인의 경험에 대한 느낌을 온전히 공유하는, 소위 ‘공감’을 경험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진정성을 확인한다.

동양철학의 권위자인 황태연 교수의 저서 『감정과 공감의 해석학』에 따르면 동양의 공맹사상에서도 공감과 유사한 개념으로 서(恕)를 언급하고 있다. 이 단어를 분절하면 여심(如心), 즉 ‘마음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공감의 상태를 ‘마음을 같이 함으로써 지탱하여, 헛되이 속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 고유의 본질에 대해 다루는 시·문학에서 발췌한 감성적인 글귀들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진정성(眞正性)을 넘어선 진정성(眞情性)을 선사한다. 만약 광화문글판이 기업의 홍보용으로 쓰였다면 사람들 마음속에 지난 25년간 이처럼 잔잔하면서도 진한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소통매체로서 광화문글판의 또 다른 매력은 ‘심미적 가치’다. 아무리 인간 고유의 본질적인 가치를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 전달 방식이 강렬하거나 압도적이지 못하면 공감하기 어렵다. 소셜미디어의 SNS 영상 플랫폼을 통해 동영상으로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최근의 젊은 세대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을 거부한다. 장황한 텍스트는 즉각 차단한다. 비록 SNS와 같은 영상 플랫폼은 아니더라도 건물 외벽에 내걸린 광화문글판은 여러 면에서 심미적 가치로 인해 젊은 세대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고 있다.

가로 20m, 세로 8m의 글판은 광화문 어디에서든 눈에 띈다. 그 압도적 사이즈에 단 20~30자 내외로 제한된 글자 수는 여백과 함께 절제의 미를 한층 높인다. “140자의 제약이 있었기에 사용자들은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 되었고 시인이 되었다”고 한 트위터 공동창업자 비즈 스톤의 말처럼 글자 수의 제약은 오히려 장점이 됐다. 30자 내의 글자가 은유적 함축성을 지닌 문안으로 전달되면서 사색과 의미 부여의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에서 발췌한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든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에서 발췌한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와 같은 은유적 글귀는 캘리그래피와 같은 감성적 서체와 예술적 감각의 디자인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진한 감동과 여운을 전달했다.

여기에 메시지가 전달되는 장소의 상징성도 빼놓을 수 없다. 광화문은 어떤 장소인가. 역사와 문화의 공간이요, 권력과 지배의 공간이고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하늘과 만나는 열린 공간이다. 이 상징성을 통해 광화문글판은 시민과 호흡할 수 있었다.

지난 25년간 가장 아날로그적인 모습으로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광화문글판은 디지털 소통매체 범람의 시대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석 같은 언어가 새겨진 글판은 시대의 아픔과 삶의 고통을 치유하는 희망의 전령이 돼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91년 고 신용호 명예회장 제안으로 첫 등장

글판은 1991년 1월 교보생명 창립자인 고 신용호 명예회장의 제안으로 처음 등장했다. 첫 작품은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는 격언이었다. 글판은 98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변했다. 국민이 고통을 겪는 그 시대에 신 명예회장은 “기업 홍보는 생각하지 말고 시민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고은의 시 ‘낯선 곳’에서 따온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라는 문구로 변화가 시작됐다. 현재의 글귀인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보았으면’(함민복 ‘마흔 번째 봄’)까지 지난 25년간 글판을 채운 글은 72편이다. 시인·소설가·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가 글을 엄선한다. ‘최다 글판 작가’는 총 7편을 올린 고은 시인이다.

김봉현 동국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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