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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중국 … '에너지 대국' 국제 무대 흔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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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 에너지, '강한 러시아'의 원동력=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00년 취임 후 곧바로 석유.가스회사를 국영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러시아 재건의 꿈을 에너지 자원에서 찾은 것이다. 에너지를 외교 무기로 활용한다는 구상은 최근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 중단 사태에서 잘 드러났다. 이를 주도한 곳은 바로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이었다. 가스프롬은 전 세계 가스 매장량(약 140조㎥)의 16%, 생산량의 20%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가스회사다. '강한 러시아'를 실현하는 선봉대 역할을 맡기에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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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대통령은 시베리아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이달 6일 시베리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드디어 올 여름 동시베리아 송유관 건설 사업의 첫 삽을 뜨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친서방 성향의 우크라이나를 손보는 데 서시베리아의 천연가스를 동원했다면, 동시베리아의 석유와 가스는 한국.중국.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줄 전망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가스 소비량의 대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해온 유럽연합(EU)에도 비상이 걸렸다. EU 집행위는 4일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EU 차원의 공동 에너지 정책을 추진키로 했다. 하지만 러시아산 에너지를 빼놓고 대책을 마련할 수 없다는 데 EU의 고민이 있다. 러시아는 전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30.5%를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가 유럽으로 가는 파이프라인을 잠그면 속수무책이다.

◆ 중국의 급부상과 미.일의 견제=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시대만 해도 석유수출국이었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석유 소비대국으로 부상했다. 석유 수입 의존도는 2002년 38%에서 2020년엔 77.6%로 대폭 확대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에너지 외교전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석유 메이저업체들이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아프리카.남미.중앙아시아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짐바브웨(7월), 콩고(9월), 나미비아(12월)의 정상들을 잇따라 국빈 초청한 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까지 나서 융숭하게 대접했다. 올 초에는 리자오싱(李肇星)외교부장이 나이지리아.세네갈 등 아프리카 6개국을 돌 예정이다.

후 주석은 9일 베이징을 방문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 볼리비아 가스전 공동개발 방안을 집중 논의했다.

이에 대해 미국과 일본의 견제도 만만찮다. 전 세계 인구의 4%에 불과한 미국은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4분의 1을 쓰고 있다. 1인당 소비량은 일본.EU의 두 배나 된다. 그래서 에너지 안보에 관한 한 미국은 양보할 기미가 없다. 동맹관계 구축과 무기 판매를 우선시했던 미국의 군사.외교 전략은 최근 유전 보호와 해상 교역로 방어로 초점을 옮겨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 역시 '민주주의 확산'이란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석유 확보 전쟁에 다름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 에너지 통제권을 놓고 조만간 미.중 간에 한판 승부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일본은 중국과 동중국해 가스전 개발, 시베리아 송유관 노선 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일본의 전략은 장기적으로 석유 의존도를 낮춰 가면서 일단 러시아산 에너지를 선점하는 것이다. 최근 마련한 '신국가 에너지 전략'에 따르면 현재 50%인 석유 의존도를 40%로 끌어내릴 계획이다. 이와 함께 '사할린1' 공구에서 생산될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으로 부산까지 운반하는 '한반도 관통 송유관 프로젝트'를 일본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중.일 간의 에너지 분쟁은 배타적 민족주의까지 작용해 긴장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 중동.남미의 고자세=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61.7%, 생산량의 30.7%를 차지하는 중동 지역은 에너지 전쟁의 최대 격전지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이자 친미 성향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은 그동안 미국과 착착 보조를 맞춰 왔다. 하지만 요즘에는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유전에서 퍼내는 석유에서 산유국들이 떼가는 몫도 증가하는 추세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압둘라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를 개인 별장인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으로 초청해 회담했다. 고유가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산유량 증산을 요청했으나 되레 "고유가는 헤지펀드의 투기와 소비국들의 높은 세금.규제 때문"이란 '항변'을 들어야 했다.

핵무기 개발 의혹을 받는 이란도 앞으로 최소한 88년간 퍼올릴 수 있는 석유 매장량을 무기로 미.유럽의 제재 압력에 맞서고 있다. '반미 연합전선' 구축을 공언하고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역시 하루 298만 배럴의 산유량을 등에 업고 있다. 그는 최근 석유 메이저 업체들에 대해 유전 개발과 석유 생산 시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와 반드시 합작하도록 계약을 의무화했다. 중남미를 종단하는 가스관 설치도 추진 중이다. 에너지 자원을 밑천 삼아 남미의 새로운 맹주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북한도 해저 유전 개발에 관심을 쏟고 있다. 북한의 서해 앞바다엔 바로 옆에 있는 중국 보하이(渤海)만 유전과 비슷한 규모의 석유가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그러나 북핵 문제가 해결되고 북.미 수교가 되기 전까지 석유 메이저들의 대북 진출은 불가능하다. 설령 경제성 있는 유전을 발견해도 중국 측과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커 석유 생산까지는 첩첩산중이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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