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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가족] 부부무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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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역시 우리 남편이 최고야.” “무슨 소리, 당신이 내 자랑이지.” 이벤트 진행자 이유경씨 부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사랑의 눈빛을 교환한다. 집안일은 물론 쌍둥이까지 돌봐주는 남편과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사회생활을 하는 아내는 남이 뭐라든 서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 [사진=김태성 기자]

각자 수입 따로 관리
집 살 땐 공동명의로

# 부부 별산은 기본 … 능률이 우선이죠

중앙일보 패밀리 리포터 권순자씨는 얼마전 큰아들을 장가보내며 당황한 적이 있다. 아들은 "결혼하면 서로 일정 금액을 내놔 공동 자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각자 관리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그러려면 왜 결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젊은 맞벌이 부부가 각자 수입을 따로 관리하고 집도 공동명의로 하는 일이 이제 당연한 시대다. 경기도 일산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선 "공동명의로 집을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전체 거래의 절반에 육박한다"고 말할 정도다.

경제적 독립뿐만 아니라 능률을 따지는 부부도 늘고 있다. 결혼 8년차 회사원인 다음세대재단 김지혜(32) 과장은 퇴근 후 두 아이 중 첫 아이만 돌본다. 이제 23개월인 둘째 아이를 돌보는 일은 힘 좋은 남편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혼 초기 서로 잘할 수 있는 것을 하자며 밥은 김 과장이 하고 설거지는 남편이 하기로 정한 이후 이런 식으로 집안일을 나누기 시작했다.

회사원 서지영(36) 과장 부부도 아들 정현이(7)의 등교 준비를 위해 역할을 나눴다. 정현이를 깨운 후 씻기고 옷을 입히는 것까지는 남편이 도맡는다. 이 시간에 서 과장은 화장을 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정현이를 어린이집 버스에 태우는 일은 다시 서 과장의 몫이다. "이런 식으로 일을 분담하지 않으면 아무도 출근 못 할 거예요."

그렇지만 아직 아쉬운 점도 있다. 김 과장은 "남편이 집안일을 자발적으로 돕지는 않아요. 제가 도움을 요청하면 남편은 항상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왜 한 박자 빨리 이야기하느냐'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죠. 아직 완전한 분업은 힘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아내 성공 위해
물심양면 전방위 외조

# 내 아내를 위하여

"당신 자꾸 이러면 나 공부 다 때려치울 거야." 경기도 파주에 사는 박명자(53)씨가 남편과 싸울 때 자주 쓰는 말이다. 박씨는 "이렇게 말하면 남편은 바로 꼬리를 내린다"며 흐뭇해 했다.

예전 같으면 남편 뒷바라지가 아내의 몫이라고들 생각했겠지만 반대로 남편이 아내의 능력 계발을 위해 외조하는 경우도 많다.

박씨는 지금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는 학생이다. 작년에 입학해 올해 2학년이 된다. 원래 그림을 좋아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던 그는 집 근처 여성회관에서 그림을 배워 2년 전 대학에 도전했다. 자영업을 하는 남편은 공부하고 싶다는 아내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심지어 남편은 초등학교 4학년인 딸 아이까지 열렬한 지원자로 만들었다. 딸 아이는 "너 이러면 엄마 공부 안 한다"라는 말 한마디에 울어버릴 정도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2박3일짜리 엠티도 다녀왔다.

'팡팡 파티'라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파티 이벤트 진행자 이유경(42)씨도 남편의 외조 덕에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네살배기 쌍둥이의 엄마이면서 돌잔치 등 이벤트 진행은 물론이고 구청 복지관이나 문화센터에서 스피치 강의를 한다. 또 서울 대학로에서 진행자 아카데미도 열어 2기 졸업생까지 배출한 맹렬한 여성이다. 집에서 이씨가 청소기를 집을라치면 쌍둥이들이 "청소기는 아빠 것"이라며 따질 정도로 남편의 외조가 살뜰하다. 건축 자재 대리점을 운영하는 남편 방용상씨는 "그저 열심히 사는 아내의 모습이 보기 좋아요. 자랑스럽기도 하고요"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젠 아내의 성공이 남편의 자랑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씨는 "주말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아 남편이 쉬지 못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게 미안해요"라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이씨는 올 하반기에 남편의 외조를 등에 업고 일본에까지 진출할 예정이다. 이씨는 "욘사마만 있나요. 전 '팡사마'로 불릴 거에요"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아이 키우기는 부부 몫
남편도 육아휴직

# 여자 일이 따로 있나요?

아내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육아는 이젠 부부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가 됐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04년 민간기업에서 육아휴직을 신청한 9304명 중 남성의 숫자는 181명(2%)이었다. 2003년 전체 6816명 중 남성의 숫자가 104명(1.5%)이었으니 완만하지만 증가세를 보이는 것이다.

회사원 황정민(34)씨는 2003년 1월 4주간 무급휴직을 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직접 아이를 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된 터라 법에서 정한 육아휴직의 요건을 채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무급휴직이라도 신청한 것이었다. "출산 후 산후조리를 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게다가 큰아이가 만 2살이 안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내에게 모든 걸 떠맡길 수 없었죠. 제가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경기도 분당에 사는 오성근(42)씨는 국내에서 하나뿐인 특이한 명함을 가지고 있다. 그의 명함엔 'househusband(전업주부남편)'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1999년 결혼한 오씨는 서울시 지방 공무원인 아내 이정희씨가 출산 후에도 직장생활을 계속 하고 싶다고 하자 망설임 없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평소 아이는 부모가 키워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오씨는 딸 다향이(8)가 학교에 입학하는 올해 동화작가로 데뷔할 계획이다. 그는 "평소 경험을 살려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내용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오씨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요새 매스컴을 보면 '그냥 주부나 할까?'라고 말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 같아요. 그렇지만 생각보다 어려움이 많답니다. 저만 해도 너무 힘들어서 운 적도 있어요." 집안일을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치기 쉽다는 말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글=조도연 기자 <lumiere@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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