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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268> 리더의 품격, 역사 속 명연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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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젊은이와 노인, 부자와 빈자, 공화당과 민주당원, 흑인, 백인, 라틴계, 아시아계, 미국 원주민, 동성애자, 이성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미국은 결코 민주당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자들로 구성돼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미합중국으로 남을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숨을 쉬고 희망을 품고 있는 동안 우리를 비꼬며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 2008년 11월 4일 시카고 그랜트파크 연설)

신진 기자

‘리더의 언어’가 주목 받고 있습니다. 명사들의 폭언·막말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술집 마담을 하면 잘할 것 같다”며 여직원을 비꼰 박현정 전 서울시교향악단 대표부터 “목을 쳐줄 것”이라며 교수들을 협박한 박용성 전 중앙대 이사장까지, 이들은 곧바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들과는 반대로 품격 있는 언어로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신진 기자 jin@joongang.co.kr

‘말은 곧 인격’이란 공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된다. 맹자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숨기겠는가”라고 했다. 영국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라고 했다.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연설문을 분석했다. 박종평의 『진심진력』, 퍼디 아디스의 『어떤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등의 책을 참고했다.

2008년 11월 4일(현지시간) 시카고 그랜트파크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대선 승리 연설을 들은 한 흑인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보다 ‘우리’를 강조하며 쉬운 언어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오바마 대통령의 소통 비법으로 꼽힌다. [중앙포토]

에이브러햄 링컨 (1809~1865)

링컨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자유 속에 잉태된 나라,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믿음에 바쳐진 새 나라를 이 대륙에 낳았습니다. (중략) 살아남은 우리들은 이곳에서 싸운 이들이 오랫동안 고결하게 추진해 온, 끝나지 않은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신의 가호 아래 이 땅에 새로운 자유가 탄생할 것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1853년 11월 19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군인공동묘지)

 남북전쟁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위로하는 내용의 이 연설은 파격적으로 짧았다. 링컨은 270여 개 단어로 구성된 연설문을 2~3분 만에 읽어내려갔다. 앞서 정치가이자 연설가인 에드워드 에버렛의 기조연설이 2시간 이상 걸린 것과 극명하게 대비됐다. 하지만 역사는 링컨을 기억했다. ‘간결함’과 ‘울림’이 비결이었다. 링컨은 4개월 동안 연설문을 다듬었다고 전해진다. 문장의 군더더기를 빼 리듬감을 살리고, ‘평등’ ‘자유’ 등의 가치는 직설적으로 드러내 메시지를 강하게 각인시켰다.

 게티즈버그 연설이 그저 잘 다듬은 연설문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링컨의 인간성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라고 후세는 평한다. 지독한 가난을 딛고 정치인으로 성공해 노예 해방에 몸바친 인간애가 고스란히 녹아들었다는 얘기다. 시골 변호사였던 링컨이 정치인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계기도 그랬다. 그는 1858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인간이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들 권리는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작가 데일 카네기는 게티즈버그 연설을 두고 “평생의 고난을 통해 위대해진 훌륭한 정신에서 나온 무의식의 서사시”라고 평했다.

 
윈스턴 처칠 (1874~1965)

처칠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입니다.”(1940년 5월 13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하원 의회)

 “우리는 바다 한가운데서 싸울 것입니다. 솟구치는 자신감과 넘치는 힘으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섬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싸우고, 바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우고, 들판에서 싸울 것입니다. 거리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1940년 6월 4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하원 의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퍼붓는 독일군의 공격에 줄줄이 백기를 들었다. 네덜란드·벨기에에 이어 프랑스까지 항복했다는 소식에 공포에 질린 영국 국민들은 직설적인 단어로 승리를 외치는 새 총리에게 금세 매료됐다. 지도자로서의 희생을 강조하며 한편으로는 군인다운 강한 기질을 드러낸 처칠은 강직한 리더십의 상징으로 추앙받는다.

 국민의 사기를 북돋는 데 성공했지만 처칠은 본래 달변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혀가 짧아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대중이 매끄러운 언변보단 진정성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내뱉은 말을 행동으로 실천한 부분도 다른 리더들과 달랐다. 그는 “런던이 점령된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집무실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실제로 독일군이 런던을 공격하는 상황에서도 피하지 않고 지하 대피소에 머무르며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이순신 (1545~1598)

이순신

 “진해루에 앉아 흥양 현감, 녹도 만호 등을 불러들였다. 모두 격분하여 자기 한 몸의 안위도 생각하지 않았다. 참으로 의로운 선비들이다.”(난중일기 1592년 5월 1일)

 “광양 현감과 흥양 현감을 불러 함께 이야기했다. 모두 분한 마음을 나타냈다. 조금 뒤에 녹도 만호가 면담을 청하기에 불러들였다.”(난중일기 1592년 5월 3일)

 “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평복을 입고 격의 없이 즐기면서 고기를 잡고 조개 캐면서 지나다닌 곳, 물이 소용돌이쳐서 배가 뒤집히는 곳, 암초가 있어 배가 부서지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공은 하나하나 자세히 듣고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직접 현장에 가서 살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후퇴하는 척 적들을 험지로 유인해 승리했다.”(성대중의 야사 『청성잡기』)

 충무공 이순신은 입보다 귀를 연 지도자다. 그가 희대의 지략가로 꼽힐 수 있었던 비결은 ‘경청’이었다. 이순신은 부임하는 곳마다 ‘운주당’이란 공간을 만들었다. 일종의 군영 막사이자 개인 집무실이었는데, 그는 “누구나 군사 관련한 이야기가 있으면 운주당으로 오라”고 공포했다. 실제로 운주당엔 부하 장수들부터 말단 병졸들까지 드나들었다. 일종의 ‘아이디어 뱅크’를 만든 셈이다. 난중일기에도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다’ ‘밤낮 의논하며 약속했다’ 등의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일반 백성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였다. 영조 시대에 대신을 지낸 성대중이 쓴 야사 『청성잡기』에는 이순신이 어민들에게 지형과 물살 등을 자세히 묻고, 직접 부하 직원들과 현장을 탐방했다고 기록돼 있다. 박종평 역사비평가는 “학익진 전략, 울돌목 싸움도 수평적 토론을 지향했던 이순신의 경청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며 “난중일기엔 관에 소속된 노비부터 소금을 굽는 일꾼까지 1000명 이상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운주당을 자기만의 성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나무 울타리를 쳐 놓고 첩을 제외하곤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는 결국 칠천해전에서 패하고 본인도 전장에서 죽었다.
 

조셉 추장 (1840~1904·미국 오리건주에 거주하던 인디언 네즈퍼스족의 마지막 추장)

조셉 추장

 “나는 이제 지쳤습니다. 나의 족장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노인들도 다 죽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젊은이들인데, 그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젊은이들을 이끄는 사람도 죽었습니다. 밖은 춥고 덮을 이불이 없어 어린 생명들이 죽어갑니다. 일부는 먹을 것도 없이 도망쳤습니다. 이미 얼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어린 것들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지만 얼마나 많이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을 죽음 속에서 찾게 될 겁니다. 지배자들이여! 나는 너무 지쳤습니다. 내 심장은 아프고 슬픕니다. 지금 태양이 떠 있는 이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겠습니다.”(1877년 10월 5일 미국 몬태나주 베어포산)

 때로는 리더의 진솔한 모습이 감동을 선사한다. 1870년경 네즈퍼스족은 금광을 찾는 백인 개척자들의 공격을 받는다. 우두머리 조셉 추장은 결국 부족민을 끌고 캐나다 국경지대로 이동한다. 이들은 국경을 64㎞ 정도 남긴 몬태나주의 베어포산에서 미국 기병대에 포위된다. 이때 조셉 추장은 한 편의 시와 같은 항복 연설을 하게 된다. 그의 연설문은 골드러시 시절 미국 인디언의 피와 눈물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여겨진다.

 조셉 추장의 연설은 담백하고 진솔하다. 항복을 결심한 리더지만 비굴해 보이지 않는다. 부족민의 생명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은 용기와 절실함이 읽히기 때문이다. 리더의 자존심을 내세워 무리한 선택을 하다가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 경우와 대비되는 면모다. 신문수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공동체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인디언의 모습은 개인주의가 만연한 미국과 비교돼 여전히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또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기에 분열하지 않고 위기의 상황에서도 공동체를 보듬는 리더십을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락 오바마 (1961~)

버락 오바마

현세의 인물 중 오바마 대통령만큼 소통에 능한 자는 없다는 사실엔 이견이 없다. 그는 힘주지 않은 일상 언어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나’보다 ‘우리’를 강조하며 단결을 이끌어낸다. 다양한 스피치 기법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점도 지지를 이끌어내는 비결이다. 침묵도 그중 하나다. 그는 지난해 5월 애리조나주 총기난사 추모 연설에서 연설 도중 51초간 침묵해 화제가 됐다. 숨진 9세 소녀를 언급하던 중 말을 멈췄다.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며 깊은숨을 내쉬다 힘겹게 다음 문장을 이어갔다. 뉴욕타임스는 “그는 전 국민과 마음을 나눴다. 재임 이후 최고의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사과해야 할 상황에서 확실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도 호감을 샀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미군의 오폭으로 알카에다에 잡혀 있던 인질 2명이 목숨을 잃자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며 즉각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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