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포상 누락된 호국 유공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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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전장에 나가서 적탄을 맞고 쓰러진 사람을 결코 잊지 않는 전통이 있다. 미국군은 전투가 끝나면 곧 유공 장병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한다.

포상 시스템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유공장병이 포상에서 누락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신(神)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아주 드물게 실수가 생기기도 한다.

*** 훈장제 생기기 전에 6.25 터져

2000년 6월 클린턴 대통령은 제2차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시칠리아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행정 실수로 포상을 못받고 있던 병사 11명에 대한 전공(戰功)사실이 58년 만에 새로이 입증되자 이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2001년 3월 13일에는 51년 전 한국전에 참전해 미 육군 제24보병사단 소총병으로 경주지구 전투에서 적탄 네 발을 맞은 로버트 필립(76)의 용감한 전투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자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베트남도 2000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24주년 기념행사에 즈음해 25년 전인 1975년 4월 사이공 점령 때 전공을 세우고도 포상에서 누락되었던 53명의 장병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보훈문화가 제대로 정착된 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는 다 이렇다. 신생 대한민국에 태극.을지.충무.화랑 등의 무공훈장 제도가 생긴 것은 1950년 10월 28일이었으며, 이에 따라 실제로 훈장 수여가 시작된 것은 50년 12월 30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17호에 의해서였다.

6.25는 이 훈장제도가 생기기 4개월 전에 일어났다. 포상제도가 없는 나라에서 큰 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또 이 4개월간이 6.25 기간 중 가장 치열한 혈투가 벌어진 시기였다.

육사 7기생의 예를 들어보면 임관 후 전사자는 모두 1백26명이었다. 22명은 6.25 이전의 여순반란 등의 공비토벌전에서 희생됐고 74명은 6.25 초기 훈장없는 4개월 동안에 전사했다. 30명은 그 후 계속된 2년9개월 간의 훈장 수여 제도가 있는 기간에 전사했다.

육군본부 기록에 의하면 50년 12월 30일부터 53년 7월 27일의 종전시까지 일선 사단장들에 의해 훈장은 계속 수여되었으며, 종전 후 1년간 전쟁 와중에서 포상이 누락된 유공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각 사단에 구제포상을 실시하라는 지시공문을 하달했다고 되어 있다.

6.25 초기 약 6개월 간은 일선 장병들의 일보(日報)이동이 심했다.

적탄을 맞고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치료가 끝난 후 새로 창설되는 부대로 보직 변경된 장병을 예로 들자면, 새로 부임한 일선 지휘관들은 과거 그 부대에서 누가 어떠한 전공을 세웠는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고 또 일단 그 부대를 떠난 장병들은 이미 자기 직속부하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포상 상신은 그들이 지금 속해 있는 부대장들의 소관업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또 상훈 담당자도 경험 부족으로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하급부대로 내려갈수록 그런 경향이 심했다.

*** 구제 못받은 장병 아직도 많아

6.25 전체 기간을 통해 전사자를 많이 낸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는 6.25초기 훈장 불모 시기에 큰 무공을 세우고도 포상을 못받은 누락자 52명에 대한 전공사실 확인서를 종합해 수년 전에 육군참모총장에게 제출했다. 각군 참전단체에도 이를 권고하고 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국방부는 지금 그 서류들을 심사 중이라고 한다. 올해 호국보훈의 달인 6월 중에 심사가 끝나기를 바란다. 단, 포상심사는 자료와 증거에 의해 엄격히 진행돼야 한다.

제3공화국 시절, 자기 아들 5명이 6.25때 전선에 나가 모두 전사했다는 서류를 내밀어, 정부에서 성급하게 그를 '반공아버지'로 지정하고 매스컴들은 떠들썩했다.

몇 개월 후 그는 가짜라는 것이 들통났다. 그런 촌극이 되풀이될 수 없는 것이다. 군 통수권자와 국방부 수뇌부나 국민들의 각별한 관심 속에 우리나라 호국보훈 문화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선진화하기를 기원한다.

李大鎔(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