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자율의 「마당」은 없었다"|양반들이 천민에 베푼 년 하루놀이가 고작|흥풀이 아닌 울분 터뜨릴 본연의 「극」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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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글은 최근 깊은 관심과 함께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마당극」논의에 맞춰 본지가 마련했던 시리즈 『마당극』(84년8월27∼29일)을 읽고 연출가 무세중씨가 기고한 반론이다.

<편집자 주>
필자는 조선시대의 풍류를 떠맡고 전국을 떠돌았던 유랑예인집단 남사당(남사당)이 60년도 후반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각광을 받으며 재기할 즈음에 참여해서 10여년간을 동거동락했었다.
당시에 나는 마당굿놀이를 제창해서 밴드음악풍으로 일관했던 많은 대학의 축제를 풍물놀이, 탈놀이의 마당잔치로 환원시키려고 노력깨나 한 사람으로 마당극에 대한 최근의 열띤 작업에 지대한 관심을 아니 가질수 없어 몇마디 제언해본다.
우리가 다알고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위에 「마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피해자 천민들의 숨통을 마지못해 터주기위해 1년에 단 하루 양반님네들 자기네들에게 실컷 욕좀 하도록 내버려둔 의도적인 마당, 그것도 일제에 침략당한후 식민지 공연법에 의해 금지되어온 상황에서 도대체 마당은 마당답게 존재하고 있는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전통유산이라는 민속극, 민속놀이등이 남아왔다. 그러나 놀이없고 탈춤없는 그 어느민족도 없듯이 우리에게 전해진것들이 우리만의 대단한 유산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감히 상상도 못할만큼 억압받던 천민들에게 인간적인 분노와 저항이 있었다면 기필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구체적이고도 호소력있는 과감한 말과 짓을 통해 부단한 예술작업을 펴내야 했을것이아닌가. 그런데도 자음적인 풍자나 익살로 엄청난 가난과 양반들의 비인간적 취급에 대한 분노를 허무하고 어이없게 삭여버렸던것이다. 그럴만한 이유는 진실로 민중의 자율적 소산이라고 하는 대개의 민속극이 권력주변에 기생했던 관노(관노)들에 의해 주선되고 꾸며졌을 만큼 나름대로의 양반들 속셈에 의해 처단된 마당놀이였을뿐이다. 또 마당굿과 마당극은 같은 말과 뜻으로 혼용할수가 없다. 마당굿은 마당굿놀이로 통하는데 굿이 갖는 제의적이며, 오락적이며, 단합적인대동(대동)놀음이 그것이라면 마당극은 극으로서 놀이라는 바탕위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통시대적인 상황을, 현장을 예리하고 냉철하게 표출해 내서 의식의 힘을 일깨움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당극에서는 흥이 철저하게 절제되어야하고 절규가 날카로운 예지로 이끌어서 참여하는 관객에게 의지의 동반자로 남아야 할것이다.
그런데 흥풀이로, 짓거리를 천박하게 다루고 흥을 마구 남용, 발산하면서 구호한다면 오히려 상향(상향)적인 흐름의 경직됨이 또 하나의 하향적인 부담으로 남아서 역겹게 되고만다. 사실 그렇게 전락되게 하는것이 몇몇 선진국에서도 볼수있는 연극보호(?)정책인것이다. 모든 자유분방한 문화, 예술운동이 끈질기고 화합적인 구체적 저항이념으로 시작된것이 아니라면 어느선까지 자유예술의 안녕(?)을 위해서 오히려 관주도와 지원아래 보란듯이 흥풀이(또는 경연)가 재촉되는것이다.
거기에 동조할 이유가 있을까. 문화의 타락은 비극적 현실을 남게 하지만 전통민속문화나 그 맥락에서만 그것을 구제한다고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이제 마당극은 「양식으로서의 마당극」보다도 「내용으로서의 마당극」으로서 「탈쓴 마당」이어야 한다. 오늘의 마당극은 보다 대국적 자세로 함축성있게 어느곳 어느때를 막론, 없는 「마당」을 확보해 들어가야 하는 개념을 갖고있다.
그리고 그 마당극이 섣불리 민중성을 전제해서 허를 내보인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방법일 뿐이다. 그럴수록 마당극의 환경은 생각보다 더욱 경직되어버릴것이다. 요는 내용있는 연극이라면 어느형식이든 수용하면서 마당극의 정수를 키우고 이끌어 나가야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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