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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람] 13평 '동네 책방' 인문학 명소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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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책에 대한 얘기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인디고 서원' 허아람 대표(오른쪽에서 둘째)와 학생들. 열띤 독서 토론 덕분에 전국 명소가 되었다. 송봉근 기자

부산 수영구 남천동에 있는 '인디고 서원'. 큰 도로에서 작은 골목으로 구불구불 200m쯤 가야 겨우 찾을 수 있다. 간판도 눈에 잘 띄지 않고 여느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잡지.참고서를 진열한 쇼윈도도 보이지 않는다. 공간이래야 고작 13평짜리 동네 서점이지만 사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서점이다.

이름만 대면 금방 알 만한 교수.문학가.시사평론가 등이 이 서점을 찾아 강연.토론을 하고 있다. 2004년 8월 문을 연 뒤 지난해 말까지 이 서점을 찾아 강연한 교수 등은 모두 14명. 도정일(경희대 영문학).강수돌(고려대 경영학).최재천(서울대 생명공학).한홍구(성공회대 역사학).장영희(서강대 영문학) 교수, 진중권(시사평론가)씨 등이다. 이 서점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이들 유명 교수가 강연이 끝난 뒤 이 서점 단골 청소년과 벌이는 진지한 독서 토론 때문이다.

인디고 서원은 전국 최초이자 유일한 '청소년 인문학 전용 서점'을 표방하고 있다. 서점 출입문엔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인디고(indigo)란 이름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자립적 아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인 '인디고세대'에서 따온 것이다.

이 서점은 주변에 20여 개의 중대형 학원이 밀집해 있는데도 학원 교재.학습 참고서.문제집은 일절 취급하지 않는다. 마케팅 전략용으로 만든 흔한 베스트셀러도 찾기 힘들다. 언뜻 보면 서점이 아니라 책 전시장 같다. 대신 서점엔 철학.문학.예술.교육.생태환경.역사 등 6개 분야의 인문학 책 3000여 권만 빼곡하다.

서점은 청소년들이 '아람 샘(선생님)'으로 부르는 허아람(35.여)씨가 운영하고 있다. 독서지도사로 활동하던 그는 청소년들이 입시 경쟁 속에서 정신적 성장이 부족한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청소년들의 문제의식을 충족시키고 키우자는 생각으로 청소년 인문학 전문 서점을 열었다. 한 달 한 번 여는 '주제와 변주'라는 이름의 독서 토론회는 서점 개점 한 달 뒤 시작됐다. 저자 사인회나 책 홍보용 행사가 아닌 "문화적으로 소외되기 쉬운 지방 청소년을 위한 진지한 대화와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자"는 취지에서다.

인문학 책 저자이기도 한 교수들은 이런 취지를 듣고 바쁜 시간을 쪼개 초청에 응했다. 3시간 동안 진행되는 강연과 토론엔 항상 50여 명이 꽉 들어찬다. 토론 참석자들은 인디고 서점에서 책을 사 읽고 서점이 개설한 홈페이지를 통해 교류하는 중.고교 청소년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자체 논의를 거쳐 초청 교수를 결정하고 e-메일로 초청한다.

토론회에 참석하는 청소년들의 진지하고 예리한 질문은 초청 교수들을 감동시켰다.

"청소년들의 논리와 진지함에 놀랐다. 제도권 교육에서 부서진 희망을 발견하는 기분."(이왕주 부산대 교수)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인문학의 힘을 믿는 학생들이 있어 고맙고 마음 든든했다."(장영희 서강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바빠서 웬만한 강연회는 가지 못하는데 이 서점의 제안은 거절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강연을 한 도정일(경희대 영문학) 교수는 토론장의 열띤 분위기에 감동돼 자신의 저서 30권을 이 서점에 기증하기도 했다. 유명 교수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독서 토론회라는 소문이 나면서 이 서점은 개점 1년이 안 돼 유명 서점이 됐다. 이젠 다른 지방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당초 인문학서적 운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씻고 개점 8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정도로 호응을 얻고 있다. 허씨는 "새해엔 학부형 독서 토론회 겸 세미나도 정기적으로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산=김관종 기자<istorkim@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인디고 다녀간 명강사들

▶진중권(중앙대 겸임교수)▶최재천(서울대 교수)▶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박정대(시인, 서문여고 교사)▶김용석(영산대 교수)▶장영희(서강대 교수)▶강수돌(고려대 교수)▶박홍규(영남대 교수)▶이왕주 (부산대 교수)▶김선우(시인)▶조병준 (시인, 수필가)▶황경신(월간지 paper 편집장)▶윤정은(웹진 '일다' 기자)▶박기범과 어린이와 평화팀(반전 평화 운동가)▶도정일(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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