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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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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있나/글렌 예페스 엮음, 이수영·민병직 옮김, 굿모닝미디어,1만2천원

한편의 영화에 대해 인간이 어디까지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질문의 답은 다음 세 가지 조건에 좌우된다.

첫째, 영화 자체의 내용적 함량. 둘째, 내공이라 부르는 논객들의 지적 능력. 셋째, 앞의 두 조건을 활성화시키는 담론의 장.

이 세 박자 궁합이 맞으면 논의는 스스로 꿈틀거리며 증식을 한다. 신간이 마치 자가증식한 거대한 유기체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감독 워쇼스키 형제가 각본까지 쓴 영화 '매트릭스'에 대해 14명의 관찰자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제시한 다양한 해석을 담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영화 비평서를 넘어선다.

'매트릭스'는 마치 계속 끓여도 진국이 우러나오는 '신비의 사골' 또는 가면 갈수록 길을 잃고 마는 '미궁'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 숨겨진 내용의 층위가 너무 두터워 흡사 '질문 종합세트'(26쪽)를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는 액션 영화의 탈을 쓰고 인간의 의식을 다룬 학위 논문"(23쪽)임에 틀림없다. 자, 체조가 끝났으니 '매트릭스의 바다'에 다이빙을 해보자.

매트릭스는 인공지능(AI)이 지배하는 가상현실의 세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인간은 기계에 의해, 기계를 위해 태어난다. 그러나 이들 중에 인공지능에 의해 양육되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인식하고 가상현실의 악몽에서 탈출하려는 저항군이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구원자를 기다려 왔다. 여기서 잠깐! 이런 식의 스토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사실 '매트릭스'는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기독교를 포함한 불교, 그리스 신화와 심지어 사이버 테크놀로지에 나오는 수많은 은유체계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인간 존재조건에 대한 현대의 신화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디어 문화비평가 리드 머서 슈서드는 "잘못 돼 가는 세상에 대한 유대교나 기독교식의 우화"(11~34쪽)로 파악한 반면, 불교학자 제임스 포드는 불교와 신화의 코드로 해석해 냈다(175~200쪽).

경제학자 로빈 핸슨은 대부분 '매트릭스'의 관객들이 윤리적 정당성에 있어 인공지능과 싸우는 저항군의 편에 서려 하지만 실제로는 인공지능이 조장하는 꿈의 세계, 즉 삶의 행복과 진보를 포기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35~47쪽).

리처드 도킨스의'이기적 유전자' 가설과 관계하기 때문이란다. 도킨스는 주장하길,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인데 이 기계의 목적은 주인 유전자의 분신을 만들어 보존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꿈의 세계를 보존하기 위해 욕망의 기계를 작동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전체 책 내용은 들판에서 만난 소나기처럼 전방위에서 의문과 관점들을 쏟아 붙는다. 과연 현실이란 무엇인가(49~64쪽)? SF 소설에서 등장했던 인공지능의 과거와 미래의 추적(65~82쪽), 현실의 패러독스에 대한 탐구(83~98쪽) 등.

디노 펠러거와 앤드류 고든이 '(매트릭스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인가 지적 허세인가'란 질문에 대해 펼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의 비교도 흥미를 끈다. 펠러거는 영화가 포스트모던 이론에 충실히 적셔져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주인공 네오가 장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속을 파서 해킹 프로그램을 보관한 장면이 나온다.

반면 고든은 훌륭한 액션영화일지는 몰라도 철학적 측면을 뽐낼 만한 영화는 못된다고 깎아 내린다. 마지막으로 과학자 빌 조이 같은 이는 '매트릭스'의 잠재적 악몽에 대해 경고를 한다.

14편 글들은 대중적으로 쉽지는 않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깊이 빠져들만한 책이다. 한편의 영화를 두고 이 정도 이야기를 나눌 만한 문화가 돼야 '매트릭스'같은 맛스러운 도가니탕이 국내에서도 끓여질 수 있지 않을까.

김민수 (전 서울대 미대 교수/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 '매트릭스' 어떤 영화

워쇼스키 형제 감독이 1999년 발표한 '매트릭스'는 SF 액션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할 만큼의 내용적.기술적 혁신을 보여준 영화다.

영화 뼈대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이 세상이 매트릭스라는 컴퓨터 시스템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기계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구세주(The One)'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이는 무용담.

노장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모티브가 얽힌 내용도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현란한 액션의 스타일도 폭발적 인기의 비결이었다.

특히 여주인공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가 날아오르면서 발차기를 하는 장면은 '무서운 영화''슈렉'등 영화에서 패러디됐다. 또 한 가지 사물을 두고 카메라가 3백60도 회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른바'불릿 타임(Bullet Time)'기법은 각종 영화와 CF에 사용되기도 했다.

<사진설명>
SF 액션 영화의 신기원을 이뤘다고 평가받는 '매트릭스'. 그리스 신화를 비롯해 장자 철학·기독교 신학 등에서 빌려온 수많은 은유 체계가 이 영화에 대한 풍부한 논쟁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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