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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의 경제격차에 초조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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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이 이른바 합영법(합작투자법)을 채택, 서방자본주의국가들로부터 자본·기술을 도입키로 했다는 것은 북한경제의 중공식 개방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북한의 경제뿐 아니라 내부권력구조·대외정책, 나아가 동북아정세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평양방송이 보도한 합영법의 내용은 한마디로 서방자본주의국가를 포함한 외국자본·기술의 진출을 받아들이고 과실송금을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79년8월에 시행된 중공의 합영법을 답습하고있다.
북한의 이같은 정책전환은 물론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이미 『자본주의국과의 경제·문화교류의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뜻을 밝힌바있다.
금년 1월15일부터 3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7기 제3차 회의에서도 다시 같은 방침을 채택, 실질적으로 개방정책에 의한 근대화노선의 제1보를 내디뎠다.
작년말 수상과 외상을 경질하고 금년 2월 새로 외상이 된 김영남이 중공을 방문한데 이어 6월에 대규모경제시찰단, 8월에 수상 강성산이 잇달아 중공을 방문, 심천·상해 등 경제특구를 시찰한 것 등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번 합영법의 채택·실시는 그동안 준비해온 작업을 현실화시킨 제1탄이라 할수 있다.
북한이 자본주의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키로 결단을 내린 배경에는 한국과의 경제력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는데서 오는 초조감과 중공의 입김이 강력히 작용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있다.
60년대 중-소 대립의 격화로 그 틈바구니에서 고통을 겪은 북한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체사상과 자력갱생을 기치로 내걸고 선진기자재의 도입 등 자력에 의한 도약을 시도했으나 그 결과는 막대한 상환불능 채무를 안게돼 국세신용만 땅에 떨어지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문에 71년부터 시작된 6개년 계획을 75년 중단하는 사태까지 빚었다.
그후 2년반의 조정기를 거쳐 78년 제2차 7개년 계획도 역시 외화부족 등으로 실패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호요방 중공당 총서기는 금년초 중공을 방문한 「레어드」전미국방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과 북한의 경제력이 앞으로 5년 이내에 7대1의 격차를 보일 것이라고 북한의 어려운 실정을 시인하고 북한의 중공에 대한 요구가 큰짐이 되고있다고 털어놓았는데 이는 북한과 그 우호국들의 입장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같은 배경아래 지난 5월 북한을 방문한 호요방은 중공의 경험을 토대로 북한이 경제개방정책을 취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는 얘기다.
관심을 끄는 것은 북한의 합영법 채택이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직후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전대통령의 방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8월17일 오학겸 중공외상은 중남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일부러 일본에 들러 한반도문제를 논의한바 있다.
또 일본 사회당의 「이시바시」(우교정사)위원장은 대통령의 방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오는 17일 중공을 거쳐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다.
그는 사회당이 일본정부의 대북한 정책에 보완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주목할 발언을 했다.
「나까소네」수상은 전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북한과의 경제·어업문제 등 민간교류는 계속 유지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한국의 이해를 구했다.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이 북한의 개방정책으로의 전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아직은 불투명한 상태다.
그러나 지난 3월「나까소네」수상의 중공방문 때 호요방 총서기가 일본과 북한의 관계개선을 권고하고 중공이 중계역할을 할 의사를 밝힌 사실이나 김일성이 「체르텥코」소련공산당 서기장과의 만찬에서 대일비난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시하누크」를 통해 대일 관계개선 희망을 전달한 것, 일본외무성이 과거부터 북한을 개방체제로 끌어내는 것이 한반도 긴장완화에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해온 것 등을 종합하면 북한의 개방정책이 일본을 크게 의식하고 있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싯점에서 합영법을 채택한 것은 전대통령의 방일로 긴밀도를 더해가는 한일관계에 쐐기를 박는 동시에 일본을 북한에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이고 있는 중공은 10억 인구의 시장을 갖고있다는 잇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기술도입에 애를 먹고있다. 북한의 경우 시장이 넓은 것도 아니고 투자환경·노동력·설비조건 등 모든 것이 불안한 상태다.
중공은 개방정책을 정착시기는 과정에서 화국봉의 제거, 문혁파의 숙청 등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으며 지금도 내부 반대세력의 존재가 대중공투자에 대한 불안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북한의 경우 김정일 체제가 굳어져 있다고는 하나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혁명을 제외하고는 과도기에 기본정책을 바꾼다는 것은 물을 건너는 중에 말을 바꾸어 타는 것처럼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 상식이다. 반대파에 구실을 주기 때문이다.
중공식 근대화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북한은 이제까지의 소·중공 등거리외교에서 명백히 중공을 선택하는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이것이 소련을 자극하리란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금년 5월 김일성의 소련방문에서 공동성명이 나오지 않은 것도 소·북한 각 노선을 둘러산 견해차이에서 빚어진 결과란 설이 있다.
북한의 노선전환은 동북아정세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던졌다고 할 수 있다. <동경=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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