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첫날부터 손현주의 눈빛에 꽂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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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연대기’(5월 14일 개봉, 백운학 감독)는 거대한 음모의 덫에 걸린 엘리트 경찰 최 반장(손현주)이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범죄 스릴러다.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뒤, 설상가상으로 그 사건을 담당하게 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최 반장의 불안하고 절박한 심리가 세밀하게 그려진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백운학(51) 감독은 “촬영하며 손현주의 눈빛 연기를 보는 게 정말 즐거웠다”고 말했다.

-액션영화 ‘튜브’(2003) 이후 정말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았다.
“그 사이 영화 네 편이 무산됐다. ‘쉬리’(1999, 강제규 감독)의 조감독 시절 때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 정도로 힘든 시간을 겪었다. 동년배 감독들 중에 나처럼 오랜 공백을 가진 이가 없다. 영화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계속 대본을 썼다.”

-이번 영화의 각본은 어디에 착안했나.
“불현듯 어떤 형사가 살인을 저지르고 그 사건을 자기가 수사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디어에 살을 붙인 게 2012년 말 영화진흥위원회의 기획 개발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며 탄력을 받았다.”

-손현주의 대학(중앙대 연극영화과) 후배지만, 나이는 한 살이 더 많다.
“5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입학해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많다. 이번 영화로 손현주를 처음 만났는데 서로 존대했다. 그는 내가 머리카락이 하얗고, 얼굴이 쭈글쭈글하다며 할아버지라고 불렀다(웃음).”

-손현주가 갑상샘암 수술을 마치고 촬영장에 왔을 때 눈물을 흘렸다고.
“그의 투병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영화가 엎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는 스태프들이 자신을 기다려줘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그가 회복 기간을 더 가져야 하는데도 촬영장에 와준 게 말도 못할 정도로 고마웠다. 그래서 더 열심히 영화를 찍었다. 사실 ‘튜브’ 때는 철이 없었고, 내가 뭘 하는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스태프들과 소통하고 즐기면서 영화를 찍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영화 초반, 시신이 경찰서 인근 공사장에서 크레인에 매달린 채 발견된다는 설정이 충격적이다.
“초반에 관객의 시선을 어떻게 잡을까 고민하던 차에 차를 타고 공사장을 지나다가 어렴풋이 크레인에 뭔가 매달려 있는 걸 봤다. 만약에 저게 사람이라면 얼마나 충격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대본을 썼다.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

-영화의 등장인물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기가 애매하다.
“맞다. 모든 사건의 뿌리가 되는 과거의 일도 그렇고, ‘대충 이렇게 해도 돼’라는 몸에 젖은 생각이 비극의 발단이 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지기 힘든, 시스템의 문제다.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나쁜 일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한다. 최 반장은 그런 사회의 때가 묻은 전형적인 인물이다. 선과 악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는 세상의 보통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단역을 제외하곤, 여배우가 한 명도 없는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다.
“보통 이런 영화에 나오는 여성은 구색을 맞추거나, 위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소모품이다. 여배우를 그렇게 활용하기 싫었다.”

-손현주의 굉장한 연기를 편집하면서 덜어내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는데.
“촬영 첫날부터 그의 눈빛 연기에 꽂혔다. 화면 크기의 변화가 많지 않은 건 손현주의 눈빛을 보기 위해 카메라의 움직임을 천천히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가 눈빛만으로 불안·초조·분노의 감정을 모두 담아낸 숏을 다 살리고 싶었는데, 너무 길다는 지적에 잘라야 했다. 정말 미치겠더라. 대본에 물음표로 남겨 놓은 지문과 대사를 상상도 못했던 느낌으로 정확히 표현해주는 배우를 만났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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