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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칼럼] '공포마케팅' 겁먹지 말고 나만의 반퇴설계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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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객원기자

요즘 급부상하는 시장이 있다. 은퇴시장이다. 베이비부머들이 본격 퇴직 행렬에 들어선 2010년부터 큰 장이 서기 시작한 곳이다. ‘100세 시대’ ‘소득절벽’ ‘국민연금 고갈’ 등 불안감을 부추기는 용어가 쏟아지면서 해마다 판이 커지고 있다. 은퇴 준비의 핵심인 ‘사적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만 따져 보더라도 은퇴시장의 엄청난 규모를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적연금 시장은 현재 377조원 규모로 매년 13% 씩 커지고 있다. 국민연금 적립액 325조원보다 많아 이제는 사적 연금의 역할이 공적 연금을 능가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2020년이면 사적연금 시장은 591조원으로 팽창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따지고 보면 사적연금 시장의 급팽창은 우리나라의 열악한 복지수준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노후의 유일한 비빌 언덕인 국민연금은 잘 받아봐야 100여만원 수준인데다 이마저도 앞으로는 점점 줄게 돼 있다. 더구나 2060년이면 국민연금이 고갈될 것이란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나온다. 여기에 국민연금 수급 개시가 61세 이후로 맞춰져 있어 보통 55세에 직장을 떠나야 하는 월급쟁이들은 6~7년의 소득공백 구간을 무사히 건너 뛰어야 노후에 안착할 수 있다.

공교육이 시원치 않으면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게 돼 있다. 마찬가지로 복지가 부실하면 사람들은 보완할 대목을 찾아 시장을 기웃거리게 된다. 수요가 생기면 공급이 뒤따르는 법. 저금리에 증시 침체로 새로운 수익원 창출을 목말라 하는 금융회사들에게 이 시장은 가뭄에 단비 격으로 다가왔다. 은행이나 증권, 보험사 어디를 봐도 은퇴연구소란 간판을 내걸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이것도 부족해서 인지 사설 은퇴연구소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이런 은퇴설계연구소가 시장공략의 첨병역할을 한다. 기존 고객을 대상으로 재무설계 상담서비스를 하는가 하면 보고서를 내고 세미나를 열어 신규 고객 유치에도 열을 올린다. 연구소마다 재무설계사·은퇴설계사 등을 수십명씩 육성해 가정 방문에도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다.

퇴직 불안감 파고드는 금융회사 상술

얼마 전 한 증권사에서 개최하는 은퇴설계 세미나에 가봤다. 자사 계열 은퇴설계연구소에서 나온 강사가 재치 있는 입담으로 열변을 토했다. “앞으로 100세까지 살아야 하는데, 55세에 퇴직하면 나머지 세월을 어떻게 보낼 거냐”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려면 최소 7억원은 필요하다” “자녀에게 손 벌리던 시대는 지나갔다. 노후는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퇴직한 후 국민연금 탈 때까지 어떻게 먹고 살거냐"…. 강의 도중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겁을 잔뜩 먹은 표정이었다.

이어 또 다른 강사가 나오더니 연금상품에 관한 소개를 시작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청중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은퇴설계연구소의 세미나는 대개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에서 은퇴는 아직 부정적인 개념이다. 빈곤·두려움·고독·무료함 같은 단어와 연관 짓기도 한다. 은퇴에 대해 이런 감정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은퇴 준비가 충분치 않은 탓이다. 실제 베이비부머의 은퇴 준비 상황은 상당히 미흡하다. 재산이라곤 아파트 같은 부동산이 대부분으로 노후생활비로 충당할 현금흐름을 만들기 어려운 자산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역시절엔 자녀교육이다 부모봉양이다 해서 자신의 노후를 대비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은퇴를 생각하면 불안해지고 우울해지는데, 은퇴 후 돈 걱정까지 겹치면 절망감이 밀려온다.

그러나 은퇴설계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수치는 어디까지나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개인이 처한 상황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계학에 ‘평균의 함정’이란 말이 있다. 조사 대상의 실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현실을 부풀리거나 축소한다는 의미다. 특히 소득처럼 표본분포가 방대한 경우 평균은 착시현상을 더욱 부추긴다. ‘100세’ ‘은퇴자금 7억원’ ‘퇴직 후 적정 생활비, 퇴직 전 월급의 70%’ 등 은퇴설계에서 자주 인용되는 수치는 대개 통계기법으로 산출한 평균값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들 숫자 앞에서 울고 웃는다. 통계숫자가 거는 마술이다.

삶의 목표에 따른 현금흐름 확보가 중요

노후 준비가 변변치 않으면 귀가 얇아지게 돼 있다. 위안거리를 찾다가 조그만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금융회사들의 은퇴마케팅은 불안한 마음을 파고들어 구매욕을 자극하는 상술이다. 이른바 ‘공포마케팅’이다. 불안감이 팽배한 사회일수록 공포마케팅이 판을 친다. 이런 마케팅 기법은 금융회사 입장에선 가장 효과적인 시장공략 방법일 수 있지만 개인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국가적으로도 자원배분을 왜곡시키는 등 폐단이 많다.

은퇴설계에서 평균적 개념을 개개인에게 두루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결국 은퇴설계는 철저하게 ‘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거주지역·소득수준·인생목표·생활방식은 개인마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금융상품으로 은퇴자금을 모으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은퇴 후 삶의 목표를 정하고 이에 맞춰 현금흐름을 이어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서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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