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now] 지갑 여는 일본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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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의 한 백화점이 2일 '복주머니'를 사려는 고객들로 붐비고 있다. 일본 백화점들은 새해 영업 첫날 여러 상품을 한 봉투에 넣은 '복주머니'를 판매한다. 봉투 안의 내용물을 미리 알 순 없지만 원래 가격보다 싸게 물건을 살 수 있어 인기를 끈다. [도쿄 로이터=연합뉴스]

2일 오전 9시 도쿄(東京) 니혼바시(日本橋)의 미쓰코시(三越) 백화점. 개점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으나 정문 앞에는 2만 명이 장사진을 이뤘다. 일본 특유의 정월 관습인 '복주머니'를 사려는 행렬이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인파에 놀라 백화점 측은 예정시간보다 10분 먼저 영업을 개시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한 11만 개의 복주머니는 두 시간 만에 동이 났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 줄이 100m를 넘자 대부분의 고객은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일부 매장에선 복주머니를 차지하려고 달려드는 인파에 밀려 일부 고객이 넘어지기까지 했다. 백화점 직원들은 연방 "질서를 지켜주세요"라고 외쳐댔다.

복주머니뿐만 아니다. 새해를 맞아 특가(特價)로 나온 고가품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다이아몬드 등 보석 5817개가 박힌 1억5000만 엔(약 12억8400만원)짜리 조명스탠드, 개 모양의 500만 엔짜리 순금 장식품도 순식간에 팔렸다.

그보다 시간이 조금 이른 긴자(銀座)의 프렝탕 백화점. 이곳에선 지난달 30일 오후 4시부터 사람들이 줄서기 시작했다. 2일엔 지난해 같은 날보다 2000명 더 많은 8000명이 입장 순서가 적힌 쪽지 표를 손에 쥔 채 개점을 기다렸다.

오전 4시에 왔다는 직장 여성 다카나시 가즈미(高梨和美.34)는 "연말 보너스를 예상보다 많이 받아 2만1000엔(약 20만원)짜리 '인기 패션 복주머니'를 되는 대로 다 살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런 풍경은 다른 백화점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쿄 신주쿠(新宿)의 이세탄(伊勢丹) 백화점은 2일 하루 매출로는 사상 최고인 26억 엔어치를 팔았다. 지난해 1월 2일의 매출(22억5000만 엔)보다 16% 늘어났다. 오사카(大阪)의 다이마루(大丸) 백화점의 매출도 7% 늘어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나고야(名古屋)의 마쓰자카야(松坂屋) 백화점은 30%나 늘었다. 3일에도 백화점을 찾는 고객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일본에선 백화점들이 1월 2일 한 해의 첫 영업일을 기념해 여러 가지 물건을 하나의 봉투에 밀봉해 넣은 뒤 이를 '복주머니'란 이름으로 판다. '1만 엔 복주머니' '3만 엔 복주머니' 등이 일반적이다. 잘못 고르면 값은 비싸지만 별로 필요 없는 물건을 살 수도 있다.

고객들이 복주머니의 내용물로 한 해 운수를 점친다면, 백화점들은 복주머니 매출 실적으로 그해 경기를 가늠한다. 소비가 크게 회복됐던 지난해 연초의 복주머니 매출은 전년보다 15~20% 늘어났었다.

그런 점에서 올해 일본의 개인소비 기상예보는 '쾌청'이 아닐 수 없다. 백화점 매출 증가는 일본 경기의 회복과 함께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겠다"는 소비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올해는 그동안 지갑을 열지 않던 중년 남성들이 가세했다.

도쿄 미쓰코시 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연초에도 '올해는 소비가 좋아지겠구나'고 직감했는데 올해는 지난해 수준을 다시 뛰어넘을 것 같다"고 말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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