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람] 전남 장성군 신촌마을 '무인 구멍가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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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군 신촌마을 주민들이 무인가게 앞에서 새해에도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서형식 기자

한 주민이 무인가게에서 물건을 산 뒤 거스름돈을 계산하고 있다.

"'무인(無人) 구멍가게'가 주민들을 양심껏 살도록 만들었지라우. 서로 믿고 사는 게 얼매(마)나 행복한지 모른당께요."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5시쯤 백양사로 가는 국도 1호선 도로변 70여 가구 310명의 주민이 사는 전남 장성군 북하면 단선리 신촌마을의 '양심 구멍가게'. 50대 주부가 식용유를 사고는 5000원짜리 지폐를 돈 통에 넣은 뒤 스스로 잔돈을 거슬러 갔다. 곧이어 주민 오기섭(66)씨가 음료수 한 병을 사고 돈 통 위에 놓인 장부에 이름과 값을 적었다. 오씨는 "당장 돈이 없어 외상장부에 달아 놓고 나중에 갚아도 서로 믿기 때문에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이 가게는 주민들이 주인인 '양심 구멍가게'다. 네 평 남짓한 가게 출입문에는 '우리 매점은 무인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선반에는 세제류.비누.담배.술 등 60여 가지의 상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상품에는 노인들이 보기 쉽게 가격표를 큼지막하게 붙여 놓았다. 주민들은 24시간 이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양심껏 값을 치르고 거스름돈을 가져가면 된다. 현금이 없는 주민들은 외상장부에 이름과 물건값을 적어 놓고 돈이 생길 때 갚는다.

주민 정한도(74)씨는 "요즘 황우석 교수의 가짜 논문으로 세상이 시끄러운데 우리 마을에서는 사람을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없다"며 "이 가게는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라고 말했다. 마을 뒤편에 있는 기도원을 찾아오는 외지인들도 주민들의 양심적인 가게 운영에 감동, 이 가게를 이용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기도원에서 요양 중인 친구를 찾는다는 송민강(48.군산시 선양동)씨는 "처음에는 돈 받는 사람이 없어 문을 두드리는 등 10여 분가량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다"며 "기도원에 갈 때마다 시내에서 물건을 사지 않고 일부러 이 가게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주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리는 이 마을에 '양심 구멍가게'가 문을 연 것은 지난해 5월. 수십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 왔던 마을 구판장이 갈수록 농촌 인구가 줄어 인건비조차 건지기 힘들다는 이유로 문을 닫으면서부터다. 주민들이 생필품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이장 박충렬(43)씨가 사비 300만원을 들여 이 가게를 세웠다. 처음엔 과연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지 주민들도 의심했다. 그러나 박씨가 매주 한 차례 팔린 상품과 들어온 돈을 맞춰 보는데 지금까지 1000원 이상 모자란 적이 없다. 모자라는 돈은 노인들이 간혹 계산을 잘못한 것으로 보고 손해로 처리하지 않는다. 물건은 박씨가 일주일에 한 차례 장성읍내 대형 할인매장에서 구입해 일반 수퍼마켓보다 싸게 판다.

하지만 이 가게가 진짜 아름다운 이유는 따로 있다. 이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돕고 있다. 이 가게의 한 달 매출은 100만~150만원. 전기 요금과 물건 구입비 등을 빼면 한 달 순이익이 15만~20만원이다. 적은 이익금이지만 마을 노인 여섯 명에게 매달 세 명씩 교대로 쌀 한 포대(20㎏)를 사주고, 혼자 사는 노인 한 명에게는 목욕비 등 생활비로 3만원을 전달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민 일동으로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16만원을 면사무소에 기탁했다.

또 '양심 구멍가게'가 생긴 뒤 이 마을은 집집이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사는 큰 변화가 생겼다. 주민 간 강한 믿음 때문에 도둑이 들까 하는 걱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장 박씨는 "주민 간에 의심은 물론 시기.질투 등도 거의 없고 단결심도 한층 두터워졌다"고 말했다.

장성=서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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