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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문화 전통수용·예술성확보가 문제|모든 예술분야서 어떻게 모색돼 왔나 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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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8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문화 전반에 민중론이 서서히 부상하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쪽에 선「민중」이란 관형사를 붙여 새로운 가치체계를 탐구하고 있으며, 예술의 전분야에서는 이에 걸맞는 내용과 형식이 모색되고 있다. 이는 분명히 80년대를 특징지을 수 있는 특이한문화현상으로서 이제 그 중반에 들어선 지금 그간의 성과와 과제 및 앞으로의 전망을 전문가의 좌담으로 들어본다.
「민중」이란 말이 여러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 개념에서 모두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민중은 누구냐」고 물었을때 그 대답은 구구하면서도 이말을 불편없이 사용하며 또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민중문화론의 근본입장은 무엇인가.
심우성=「민중」이란 말을 꼭 세모다, 네모다라며 고착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되면 이 말이 갖고 있는 정치적 사회운동적 의미 때문에 간혹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오늘날 민중론이 대두된 뿌리는 가깝게는 60년대 중엽, 국제적으로는 제3세계의 각성과 자기발견이 시작되고, 국내적으로는 산업화 과정에서 극심한 전통의 단절과 계층간의 소외를 느끼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신경림=우리문화가 밖의 문화, 밖의 힘으로 왜곡되고 더럽혀진 것을 바로잡고 키워나가는 것이 근본 입장일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적 동질성을 찾고 확인하는 운동이라고 봅니다.
이건호=문화, 특히 예술에서 민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민중예술은 이런 것이니까 이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다중·대중들이 만들어 낸 문화소비에선 자기 가치를 모르고, 자기 필요를 모르고, 자기를 어떻게 완성할지 모르는 잘못이 많으니까 이런것과 구별해서「민」자가 붙은 예술론이 논의된 것 같습니다.
심=실제로 일찍부터 민중이란 말을 사용한 분들은 그동안 진행된 지배적인 예숲들이 민족적 양심에서 벗어난 것들이 많으니까 이린 것을 가려내자는 건설적인 뜻에서 개념의 정립없이도 사용하기 시작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면 민중문화론은 현재 어떤 상황속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무엇을 거부하고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유홍준=미술의 경우 민중문화론은 분명히 8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70년대에도 김윤수씨같은 평론가는 이 문제를 자주 거론했읍니다만 그때는 왜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느냐는 일깨움 정도였읍니다.
그러나 80년대 젊은 작가들은 미술은 대중과 원만히 교감될 수 있는 것, 현실속에서 그 소재를 찾아내는 것, 「국제성」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적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런 반성 속에서 새롭게 추구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민중미술론이 대두된 것입니다. 우리문학과 비교해보면 60년대 후반의 참여문학을 비롯, 리얼리즘론·농민문학·민족문학론·제3세계문학론 등으로 그 관점과 논의가 이행, 발전돼온 양상에 비추어 볼 때 지금우리미술계는 문학이 근 15년간 쌓은 경험량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시끌시끌한 모습이 되고 있읍니다.
이=음악에선 민중론이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 있습니다. 소위 기성음악계 내부에서는 이것을 심각한 쟁점으로 삼고 있지도 못하고, 다만 음악계 일각, 또는 외부에서 소집단 문화운동의 형식으로 김민기·김방남 등의 노래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소집단 문화운동이 던진 의미는 왜 음악이 사회와 무관하냐는 당연한 반문을 제기하면서 현실과 음악, 다중과 음악의 만남이라는 이법적 과제를 생각케 하고 자성케 한데 있읍니다. 이런 문제 제기는 이강숙씨가 일찍부터 비친 바는 있읍니다만 아직도 음악계 내부에서는 깊은 충격이 되지는 못한 단계입니다.
신=문학의 경우 본래 민중문학론은 민족문학·분단시대의 문학·제3세계 문학론의 연장 선상에서 발전했읍니다.
80년대 들어와서 우리민중문학은 그 방법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민중이 참여하는 문학에로의 발전입니다.
그동안 전문가(지식인)가 민중적 입장에서 문학을 서술한 것과는 다른 양상입니다. 대전의「삶의 문학」, 광주의「일파놀이」등을 비롯해서 전문가의 생각만으로 쓰는 것은 부족하고 우리도 참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데서 온 소산입니다.
이들의 성과를 보면 상당한 수준은 아니어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읍니다.
이들은 소규모의 새로운 매체를 이용해서 발표하며 또 발전되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민중문학의 촉매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의 형식을 보면 종래의 시·소설·수필 등 분명한 장르 의식없이 정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국 민중예술은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심=연극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요.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굿과 새로운 판놀이 등은 연극이 바로 전통유산이 풍부한 가장 행복한 장르이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일부 기성 연극인들은 이것을 외면하거나 백안시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벽은 빨리 부서져야 합니다.
민중문화론의 당면한 과제는 여러가지 형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자체의 문제, 전통양식의 수용문제, 그 나름의 예술성 확보 문제 등 입니다.
이=음악의 경우 소집단 문학운동은 주위의 호응없이 외롭게 진행하다보니 아직도 다중과의 만남이라는 단계를 올라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운동이고 보니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는데 개치프레이즈 자체가 목적처럼 돼가는 경향도 있읍니다.
또 우리가 국악이라고 부르는 전통음악은 하루 빨리 시간의 축을 오늘 아니면 미래에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완순시대를 기준으로 두고 과거에 의해 현재를 조절하려고 하고 있읍니다.
심=민중예술을 하자면 자연히 과거의 민중예술 형식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꼭「무형문화재 보호」식으로 파악하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무형문화재」현상은 민중사회의 맥락이 끊겨 일어난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라는 새로운 각성과 의식에서 새롭게 재창조해야 할것입니다.
유=바람직한 민중미술이라면 민중적 내용을 민족적 형식으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오염되지 않은 민족적 감성을 회복하여 그것의 조형언어와 문법을 찾아내야 할 것인데 요즘 젊은 화가들 중에는 이것을 민화에서 얻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소위 민화는 결코 민중미술의 좋은 예가 될 수 없습니다. 전통이 모두 훌륭한 것이 아니듯이 민중의 일반적인 생각과 희망에는 허황된 것, 자신의 처지와는 정반대인 것이 있어 왔습니다. 또 의식없이 상류문화를 흉내내며 조그만 예술적 만족을 느끼기도 했읍니다.
더우기 우리가 민화라고 부르는 그림의 상당수가 어엿한 도원의 그림이고 또 민간의 수요가 아니라 양반 또는 궁중의 장식화였읍니다.
이것을 가려내면서 진실로 우리의 정서를 살찌게 할 조형요소를 발견해가려면 미술사학의 절대적인 지원과 새로운 탐구작업이 수행돼야합니다.
신=그것은 미술사학뿐 아니라 역사학 국문학 민속학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제 민중미학이 성립해야될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민중문학이라면 머리를 흔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흔한 도둑이나 깡패얘기는 이제 지겹다는 겁니다. 문학이 예술인한 서정성이란 측면을 잃어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적 서정성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민중미학의 탐구는 음악의 경우 더욱 시급합니다. 음악은 그것을 만들기 이전에 음악적 재료가 있는데 지금 무리의 음악적 재료는 서양고전 음악·대중가요·국악·트로트·로큰롤 등이 완전히 혼합된 실정이어서 난해하기도 합니다.
신=결국 민중문화론은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찾는 작업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술이 통일에 기여하는 방법은『통일을 이루자』고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통일을 관념화하거나「이산가족」같은 고향타령의 감상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을 뿐입니다. 남불으로 갈라진 민족현실에서 막힌 벽이나 왜곡을 걷어내고 민족적 공동체 형식을 창출할 수 있는 민중문활론이어야 하겠읍니다.
참석자
신경림<시인>
심우성<극단 서낭당대표>
이건용<서울대교수·작곡>
유홍준<미술평론가·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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