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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9><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2)무정 정만조선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또 한분 무정 정만조선생은 조선문학과의 강사로 한주일에 두시간 연속강의로 우리나라 한시를 강의하였다. 고려때의 이규보로 부터 시작해서 이조에 들어와서 역대 한시인들의 유명한 시를 해설하고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조선문학파에는 1학년에 학생이 없었다. 경성제국대학의 특색은 조선사학과와 조선문학과가 있는 것이어서 다른 대학에 없는 이 학과로 많은 학생이 몰릴줄 알았었는데, 사실은 학생이 별로 없었다. 1회에는 조윤제, 2회에는 이희승,3회에는김재철 이재욱이 있었고 4회에는 한사람도 지망자가 없었다.
예과에서 학부로 올라갈 때에 조선문학과에는 가려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다다」(다전) 라는 한문선생이 나를 불러 조선문학로 가는것이 어떠냐고 권하였다. 「다다」선생은 유진오의 유명한 단편소설『김강사와 T교수』의 모델로 나오는 T교수였다. 장차 조선문학과 교수로 올라가려는 야망을 가진 그는 예과교수로 있으면서 대학의 조선문학과 강의를 열심히 들으러 다녔고 육당 최남선에게도 『선생님,선생님』하고 집으로 출입하면서 조선문학공부를 열심히 하였다.「다다」선생은 조선문학과 교수들에게 생색을 낼 작정으로 나를 그리로 가라고 권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로 말하면 조선문학과를 졸업한댔자 중학교조선어 선생으로 가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다다」 선생을 찾아가서 조선문학과의 과목중에는 흥미있는 과목이 있으므로 영문학과 강의를 들으면서 몇 가지 조선문학과의 과목을 듣겠다고 하였다.
나는 영문과로 올라온 뒤에 조선문학과에 시간이 상치되지 않는 강의가 없나하고 뒤지다가 정만조선생의 역대시선 시간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 시간에 수강신청을 냈는데 내가 수강신청을 안냈더라면 큰일날뻔하였다. 그 시간에 수강신청을 낸 사람은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생이 없으면 그 과목은 폐지되는 것이므로 만년의 대제학을 위하여 다행한 일이었다.
무정선생은 창강 김택영·매천 황현과 함께 근대의 대시인으로 유명한 『용등시화』의 저자였다.
무정선생은 그때 이미 칠순의 노령이었는데 키는 작고, 머리를 박박 깎고 연경을 썼는데 한가지 특색은 명주두루마기의 고름에다 흰수건을 붙들어매두어서 무시로 나오는 콧물·눈물을 씻는것이었다.
선생은 나 하나를 앉혀놓고 강의를 시작하였는데 어쩐 일인지 김X준이가 가끔 들러 두사람이 될때가 많았다. 김은 중국문학과 2학년이었는데 한시를 잘지어서 무정선생이 귀애했고 나혼자만 있는것이 딱해서 무정선생을 위한 응원병으로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
이규보의 시를 끝낼 무렵 김은우리나라 시인의 시보다도 당시를 강의해달라고 선생께 말씀하였다.
나도 찬성하였으므로 무정선생은 당시속에서 유명한 것을 몇편씩 골라 프린트 해가지고 와서 때로는 읊기도하고 때로는 소리 높여 읽어 내려가면서 시경을 해설해 나갔다.
둘이서 듣기가 아까울만큼 선생의 강의는 천하일품이었다.
김은 졸업논문으로 『조선소설사』를 쓴 사람으로 나중에 유명한 「투사」가 되었는데 그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내가 연전에 『당시선』을 출판했는데 그원고를 쓴 밑천이 무정선생의 이 강의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만일 독자들이 그시의 해설에 감동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무정선생의 명강의를 베낀 때문이라는것을 알기 바란다. 다정한 모습으로 교단에 서서 아름답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흐르듯 두보의 시경을 설명해 나가는 대시인 무정선생의 강의는 지금은 누구에게서도 들을수 없는, 진실로 인상적인 명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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