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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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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나는 기다렸다. 그때그때 해뒀어야 할 통장 정리를 안 한 스스로를 벌하는 의미에서. 또 통장 정리라는 사소한 일을 바쁘고 유능하고 친절하며 예의바르기까지 한 직원에게 부탁한다는 게 미안해서. 그런데 내게 주는 벌이며 인내심이라는 게 고작 30초짜리밖에는 안 되는 건지 30초가 지나자 전화를 계속 붙들고 있는 직원을 "잠깐만요"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다시 10초쯤 지나자 전화가 오기 전에 내 용건이 '통장 정리'라고 말을 했더라면 이미 반은 되었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10초가 지나자 어떤 인간이 제 집에 편하게 앉아서 전화로 은행 일을 다 보려고 하는지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수첩을 꺼내 "통장 정리"라고 써서 직원의 눈앞에 무례하게 들이밀었는데 그때라고 해봐야 내가 직원 앞에 선 때로부터 1분도 되지 않았다. 나는 "미안합니다"라고 쓴 뒤에 줄을 쳐서 직원에게 다시 보였다. 직원은 걱정 말라는 듯 내게 미소를 지어보인 뒤 한 손으로 통장 정리를 하기 시작했고 면이 바뀔 때마다 통장을 기계에서 꺼냈다 집어넣었다를 반복하면서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이따금 내게 웃어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면전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손님보다 전화를 걸어오는 손님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전화 벨소리가 우는 아이처럼 시끄럽게 느껴지는 걸까.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기 때문에 한층 주의를 기울이게 되어 있는 건 아닐까. 업무를 기계를 통해 처리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하는 건 아닐까.

통장 정리를 하는 데 걸린 시간은 3, 4분쯤 되었다. 통장을 받아든 나를 향해 직원은 전화기를 목에 건 채 죄송하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하고 다음 손님을 부르는 벨을 눌렀다.

그날따라 대부분의 창구(관공서.매표소 등등)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디서나 사람보다 전화가 우선이었다. 전화를 받고 있는 담당자에게 내가 직접 와서 기다리고 있으니 당장 그 전화를 끊고 내 일을 먼저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화로는 왜 이렇게 일을 늦게 처리하느냐고 고함을 칠 수도 있겠지만.

일을 하나 처리하고 나서 내가 직접 온 사람을 좀 생각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어느 담당자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하면 편한데 왜 직접 왔느냐고 했다. 집에서 하면 비용을 할인해 준다고도 했고 온라인 상담원이 있으니 e-메일을 보내라고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사람보다는 전화가, 전화보다는 인터넷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듣자하니 그 분야에서는 요즘 문자 메시지가 가장 위력적인 소통수단이라고 한다. 편지도, 전화도, e-메일도 문자메시지 앞에서는 빗살무늬토기나 다름없단다. 그런데 왜 그 위대한 문자 메시지로 하찮은 통장 정리 같은 건 안해 줘서 이렇게 사람을 왔다갔다 하게 하는 건지. 운동 좀 하라는 배려인가?

성석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