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한일회담(252)한국모독발언사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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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다까스기」망언은 한차례의 외교적 확인행위로 끝났다.
나의 독단적 수습방안과 이에 대한 일본축의 고분고분한 순응 자세가 더이상의 파문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야당축과 국민의 당시 관심사가 월남파병 문제에 쏠려 있었던 것도 파문 확대서 막는 한요인이 됐다고 생각한다.
대사를 위해 망언의 파급을 막긴했지만 울분은 말할것도 없고 일이라도 그르쳐 한일현안 타결이 만족스럽게 안될 경우 내 행위가 두고두고 비관의 도마에 오를 것을 생각하면 난감한 마음을 금할수없었다.
특히 5·16군사혁명이후 일본지도자들이 우리서 얕보고 모욕한 발언을 돌이켜보면 더욱 한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오오히라」 외상은 62년7월18일텔리비전회견에서『한일화담에서 한국이 강경한 태도틀 취하고 있는것은 미국이 원조를 해주기 때문인데, 언젠가는 이런 태도가 수정될것』 이라고 방자하게 말해 일본인의 속마음을 드러냈던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이 연장선상에서 62년 가을 한일재산청구권을 마침내 「독립축하금」으로 주는 것이라고 떠들어대기까지 했던 젓이다.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 이면에서 많이 협력한 친한로비이스트의 한사람인 우파지도자 「오오노」 (대야반목) 자민당부총재까지도 박정희대통령 취임식에 경축사절로 방한하기 직전『나와 박정희씨와는 피차 부자지간아라할 만큼 친한 사이이며 그의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마치 아들의 경사스런 자리에 가는 것처럼 기쁘다』 (조일신문 63년12월5일 보도)는 무례한 말을 할 정도이니 일본인의 속마음은 짐작할만 한것이 아닌가.
「오오노」부총재는 또 『한국에서는 원양어업같은 것이 필요없지 않느냐』 고 말해 우리의 분노를 한층 돋웠지만 실언이후 바로 방한,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 일본에서 가장 힘을 기울이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강조하고 자신의 실언은 모두 외부된 것이라고해명했다.
그러나 「오오노」부총재의 부자지간 발언은 야당측이 두고두고우리 정부의 대일저자세를 성토하는 본보기로 활용했다.
「이께다」(지전) 수상도「흄」 영국외상을 만나 한국문제를 거론하면서『한국은 무리해서 민정이양을 하는것 보다 군정하예 있는 편이 낫다』 는 망발을 할 정도로 일본인들은 우리를 한수 접어놓고 바라보는 시각을 숨기지않았던 것이다.
지난 수년간 우리 국민감정을 분격케하고 한일양국간의 외교분쟁을 야기시킨 일본역사교과서왜곡문제도 바로 이같은 일본인의 잠재적인 대한우월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할것이라고 나는생각한다.
나의 사적인 경험을 봐도 일본인의 대한인식은 한마디로 가관, 그것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이후인 66년가을 일본 보수파의 거두 「요시다」 (길전무)전수상은 나에게 『종전전 만주에서 봉천총영사로 있을때 조선을 종종 방문하니 일본이 학교와 산업시설도 지어놓고 해서 조선인들에게 좋은일을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봤는데 해방후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적대시하는 것은 이해할수없다』 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화가 나서 『「맥아더」 원수의 일본점령기간동안 배상청구도 안하고 전쟁복구를 많이했는데 당시 수상을 한 선생은 일본이 계속 미군점령하에 있기를 바랐느냐』 고 몰아치자 「요시다」씨는 『하긴 그렇군』 하고 자신의 잘못된 대한관을 반성하는체했다.
일본인의 마음속에 흐르는 이같은 대한우월의식은 하루아침에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과 만나 얕잡히는 행동을 햐지많는 자존 자세가 요구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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