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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폭설 … 눈에 갇힌 호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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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호남 지방에 폭설이 내린 21일 담양군 고서면의 한 주민이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다(사진위). 같은날 밤 호남고속도로 광주 톨게이트 앞에서 연료가 바닥난 차량에 SK 주유소 직원들이 무료로 휘발유를 넣어주고 있다. 광주=양광삼 기자

"눈이 겁나게 와서 옴짝달싹을 못한당게. 사람 댕기는 것은 생각도 못혀…."

전북 순창군 복흥면 대가마을의 김어녕(78)씨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지붕이 무너질까 봐 걱정이 되는데 대피할 마을회관마저 없다"고 말했다.

20여 가구가 사는 대가마을은 21일 하루에만 60㎝가 넘는 눈이 내렸다. 아침부터 3~4m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쉴 새없이 눈보라가 몰아쳤다. 하루 20여 회씩 드나들던 순창.정읍행 버스는 아침부터 끊겼다.

이장 송관수(45)씨는 "마을 주민들이 문밖 출입을 엄두조차 못 내고 방안에만 갇혀 있다"며 "옆집 주민들의 안부도 전화로만 묻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마을은 4일부터 거의 매일 눈이 내려 그간 총 적설량이 2m를 넘는다. 기상청 통계로는 이달 들어 143.5㎝의 눈이 온 정읍이 최대 적설 지역이지만, 이 마을이 자체적으로 적설량을 측정한 결과 2m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공무원.경찰 등이 나서 염화칼슘을 뿌리고 마을 주민들이 트랙터 등을 동원해 제설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21일에는 이마저 포기했다. 마치 하늘이 열린 듯 눈이 쉴새없이 퍼부었기 때문이다.

복흥면은 해마다 눈이 많이 내려, 주민들은 겨울마다 라면 등 생필품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김득수(51)씨는 "마을에 점포마저 없어 김장 김치 등 있는 것만 먹고 살고 있으며, 우선 급한 것은 옆집에서 빌린다"고 말했다.

인근 마을 학생까지 포함해 전교생이 52명인 동산초등학교의 경우 21일 단축수업을 했지만, 계속되는 폭설로 집이 먼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박일환 교감은 "길인지 절벽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눈이 쌓여 위험하다. 아이들 10여 명과 함께 학교 관사에서 잘 생각"이라고 말했다.

순창군 복흥면과 이웃한 전남 장성군 북하면 증평2구 강선마을 14가구 주민들도 12월 들어 사실상 고립생활을 해오고 있다.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다니는 군내버스는 2주일 넘게 끊겼다. 이 마을은 해발 400여m 고지대에 위치해 도로의 경사도가 심해 눈이 많이 내리면 차량의 통행이 전면 중단된다.

관절염을 앓고 있는 노병하(60.여)씨는 "열흘 넘게 병원을 가지 못하고 있다"며 "약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러지 못해 가족들이 해 주는 찜질로 겨우 아픔과 고통을 달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호(14.약수중 1년).김기복(11.약수초 4년)군 등 이 마을 학생 두 명은 이달 들어 엿새밖에 학교에 가지 못했다.

일부 주민은 기름이 떨어져 보일러를 가동하지 못해 추위에 떨고 있다.

이장 김달순(49.여)씨는 "일주일째 보일러를 못 틀고 식구 넷이 전기장판에 의지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LP가스를 배달받을 수 없어 일부 주민은 가스레인지 대신 아궁이에 불을 때 끼니를 때우고 있는 형편이다.

이장 김씨는 "젊은 사람들이 사나흘에 한번 어렵게 면사무소 소재지에 나갔다 올 뿐 대부분의 주민이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성군 북하면사무소의 신철현씨는 "농촌 마을 주민 대부분이 노인이고 젊은 사람이 없어 눈이 내려도 녹을 때까지 하늘만 쳐다보면서 기다릴 뿐"이라고 전했다.

서형식.장대석 기자<dsjang@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yks23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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