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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고요한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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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818년 크리스마스 이브.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오베른도르프의 성 니콜라스 성당엔 큰 일이 생겼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찬미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오르간이 고장 났기 때문이다. 마을엔 수리공도 없었다. 이제 그곳 사람들은 찬송과 음악이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할 판이었다.

신부 요셉 모르는 그건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던 그에게 오르간 대신 기타를 쓰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2년 전 자신이 지은 시에 곡을 붙여 기타로 연주하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모르는 급히 성가대 지휘자인 프란츠 그루버에게 달려가 작곡을 부탁했다. 시를 보고 금세 좋은 영감이 떠오른 그루버는 3시간 만에 곡을 만들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세계인이 가장 즐겨 부르고, 즐겨 듣는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이렇게 탄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서부전선. 독일군과 연합군 사이에 단 하루도 총성이 멎을 날이 없던 그곳에 크리스마스 이브가 찾아왔다. 날이 어두워지자 독일군 참호에선 '고요한 밤…'이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독일군의 한 병사가 참호에서 나왔다. 그는 반짝이는 촛불로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고 영국군 진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소리쳤다.

그걸 본 영국군은 총을 내려놓고, 독일군에게 성탄 인사를 건넸다. '죽음의 땅(No Man's Land)'으로 불리던 서부전선엔 잠시 평화가 왔다. 들판에는 '고요한 밤…'을 합창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병사들은 전우와 적군의 시신을 수습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자 전투는 양군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병사들의 가슴속엔 성탄절 전야의 기적 같은 평화가 소중하게 간직돼 있었다. 미국 가수 가스 브룩스(Garth Brooks)가 부른 '벨로 우드(Belleau Wood)'는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전쟁터에서도 천국은 찾기 나름"이라고 노래했다.

거리엔 성탄절 분위기가 가득하다. 어딜 가든 밝고, 평화롭다. 전방은 어떨까. 휴전선의 남과 북의 병사들이 "메리 크리스마스"를 주고받을 수는 없을까. 확성기로 인사하는 것이라도 좋다. 그 한마디로 병사들이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휴전선의 밤이 늘 고요하고 거룩하면 좋겠다.

이상일 국제뉴스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