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의 「오늘 」있게한 주춧돌|타계한 노기남대주교의 일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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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노기남대주교의 선종은 생전의 숱한 일화와 함께 한국부주교회사의 한 마디서 끝마름했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주교로 세계적인 오늘의 한국천주교서 발돋움시킨 밑돌이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노대주교가 차지하는 가부장적 위치는 단순한 「원노」 의 자리를 넘어선 근대 한국전주교 방전을이끈 「제1세대」 라는 영광을 함께 갖는다.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기의 대부분을 평남개천에서 보냈다.
산골에서 16세까지 한문서당을 다녔다.
노대주교는 17세에 서울 가톨릭 소신학교에 입학, 대신학교까지의 신학교과정을 마치고1930년 신부서품을 받았다.
1942년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주교로 승품된 그는 8·15해방과함께 교계 내외에서 눈부신 활약을 전개, 「정치주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서울에 진주한 미군장교 신자들을 명동성당에 초청해 미사를 집전해주고 미군정청요인들과도 폭넓은 친분을 다졌다.
특히 이승만대통령과의 관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희비의 일화서 남겼다.
이박사의 환국에서부터 6· 25전쟁 휴전조인때까지는 아주 긴밀한 사이였다.
장면박사를 초대 주미대사로기용케 한데에도 그의 힘이 컸다.
이박사와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것은 그가 경향신문 사장직을 맡으면서부터-.
경향신문의 반 이박사 논조는 끝내 돌이킬수 없는 「틈」을 벌려놓았고 마침내 신문의 폐간조치에까지 이르렀다.
1962년 대주교로 승품된그는 김수환주교가 추기경 승품을 받아 한국천주교의 「얼굴」로 부상하는 67년까지 명실공히 한국천주교 제1인자의 위치를 누려왔다.
6·25전쟁때는 마침 파리출장중 전쟁이 일어나 외신기자회견을 갖는등 민간외교는 물론, 주불대사관을 일시 통솔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면주미대사에게도 파리서 전화를 걸어 대미관계 외교활동을 간접지원했다.
신학적으로는 온건 보수노선외 입장을 견지해왔다.
어쨌든 노대주교의 선종은 거역할수 없는 인간수명에의 승복이긴 하지만 한국천주교의 한시대를 끝맺는 역사의 흐름이기도하다.
노대주교의 보신탕일화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로마주교회의장에서까지 여담의 화제가 됐고 선종전까지도 최고의 입맛을 돋워준 기호음식이었다.
보신탕에 얽힌 그의 걸작일화는 『개들이 노대주교가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도망간다』는 이야기다.
이 일화는 실제로 있었던 실화-.
경기도의 한 여신자가 그의 보신탕 기호에 맞추어 어느 여름날 황구를 한마리 준비했다.
그가 도착하기 전날 쇠줄 올가미에 잡아매어두었던 황구는 밤사이에 줄을 끊고 도망쳐버렸다.
노대주교가 도착하자 신자는 『개가 주교님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망쳤다』면서 보신탕접대의 실패를 못내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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