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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球와 함께한 60年] (41) 이탈리아 세계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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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나는 1978년 국가대표팀 단장으로 네덜란드 5개국 친선 대회와 이탈리아에서 열린 제25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그 경험은 내가 훗날 국내 프로야구의 토대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78년 6월이었다.최인철 야구협회 부회장이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며 불렀다.그 자리에서 최부회장은 이탈리아 세계선수권과 네덜란드 친선대회에 초청받았는데 나보고 단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8월 9일 선수단을 이끌고 출국했다. 네덜란드 대회는 세계선수권의 전초전 성격으로 8월 13일부터 21일까지 치러졌다. 일본.호주.한국.쿠바.네덜란드 등 5개국이 참가해 더블리그로 경기를 벌였다. 한국은 쿠바에 6-3,4-1로 2연승을 거두는 등 좋은 성적으로 2위를 차지했다.1위는 일본이었다.

한국 대표팀이 아마야구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쿠바를 이긴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네덜란드 대회를 끝내고 이탈리아로 이동해 8월 25일부터 9월 6일까지 11개국이 참가한 세계선수권대회를 치렀다.한국 대표팀은 일본을 5-4로 꺾고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이 일본을 세계대회에서 이긴 것은 77년 니카라과 수퍼월드컵 우승 이후 두번째였다. 이 대회에서는 쿠바가 우승했고 미국이 준우승을 했다.한국 대표팀은 이 두 대회를 통해 유럽에 '한국 야구가 세계 수준'이라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나는 한달 동안 대표선수들과 함께 숙식하면서 '한국야구에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은 선수들이 너무 일찍 유니폼을 벗는다는 것이었다.

대표 선수 가운데 고참 김우열(29).유남호(27)등은 열심히 하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대학생으로 태극마크를 단 최동원.김시진.임호균 등만 이를 악물고 뛰었다. 20대 후반이 되면 벌써 은퇴할 생각을 하는 분위기가 선수단에 팽배해 있었다.

나는 가까이 지내던 재일야구인 장훈으로부터 "타자는 서른이 돼야 타석에서 공이 제대로 보인다.경험이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그래서 서른도 안돼 은퇴를 준비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다.

국내 성인야구의 분위기도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팀에 입단하면 선수 생활을 계속하기보다는 사무직으로 전환해 은행업무를 익히는 데 주력하는 경향이 있었다.

선수들 뿐만 아니라 코치들도 그랬다. 감독을 보좌하고 다른 야구 선진국 코치로부터 한가지라도 더 배울 생각은 하지 않고 관광이나 쇼핑에 더 열을 올렸다.

네덜란드 대회 때였다.나는 저녁식사 뒤 코치, 감독과 맥주를 한잔하며 야구 얘기를 나누곤 했다. 술자리는 밤늦도록 이어지기도 했다.

역시 술자리를 가졌던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깨어 화장실에 가던 중 문득 창밖을 보니 호텔 정원에 누군가가 혼자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동도 채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김응룡 감독이었다.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산책하고 있었다. 늦도록 함께 술을 마셨지만 남은 경기에 대한 구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밖으로 나왔던 것이었다.

그는 프로야구 감독이 된 지금도 혼자 새벽에 등산을 하며 경기를 구상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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