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멀고 먼 '동아시아 공동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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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번에는 중국보다 일본에 대한 시선이 차가웠다. 야스쿠니(靖國) 신사 문제 등으로 일본의 아시아 외교, 특히 중국.한국 외교가 정체된 데다 일본이 전쟁 전 역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대조적으로 중국은 적극 움직여 일본의 영향력을 봉쇄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와의 회담을 거부함으로써 일본이 입은 상처는 컸다.

일본과 중국의 쟁점은 '동아시아' '동아시아 정상회의' '동아시아 공동체'란 개념을 둘러싼 것이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은 10개국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 한국.중국.일본을 합친 '아세안+3'이 1997년부터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다. 중국은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해 '아세안+3'이 기본이라고 생각해 왔다. 반면 일본은 '열린 지역주의'를 전제로 호주.뉴질랜드.인도가 참여하는 동아시아 정상회의를 동아시아 공동체의 기초로 생각했다. 중국은 역사 문제로 인해 뒤처진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확대하기 위해 동아시아 공동체의 개념을 역내로 한정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호주 등 민주주의 국가들의 참여를 원했다. 여기에는 미국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이번 동아시아 정상회의는 '아세안+3' 연례회의 직후 열렸다. '아세안+3'정상회의에선 '아세안+3'을 동아시아 공동체의 '중요한 수단', 아세안을 '추진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아시아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쿠알라룸푸르 선언에선 동아시아 정상회의가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규정했다. 결국 동아시아 정상회의는 '아세안+3'의 보완적인 입장이 됐고, 존재의의가 모호해졌다. 향후 러시아가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참가하면 그런 경향은 더욱 짙어질 것이다.

90년대 초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서구를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협력체로 동아시아경제그룹(EAEG)이나 동아시아경제공동체(EAEC)를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미국 등의 강력한 반발로 좌절됐다. 97년의 아시아 통화위기 뒤 개최된 아세안 30주년 회의에선 지역협력의 중요성을 통감한 가운데 '아세안+3'이 시작됐다. 아세안의 동남아시아와 한.중.일의 동북아시아의 공통점이 동아시아여서 '아세안+3'은 '동아시아'로 인식되게 됐다. 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의 역사적인 만남,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 주장 등과 같이 한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협력을 먼저 추진했지만 일본이 역사 문제로 뒤처진 사이 주도권은 중국에 넘어갔다.

현재 아시아에는 아세안+3, 동아시아 정상회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아세안지역포럼(ARF),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등 많은 지역 협력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그러나 회의나 협력기구를 만들고, 거기서 영향력 경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하루빨리 역내에 산적한 긴급한 문제 해결에 구체적으로 나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중.일이 보조를 맞추는 것에서 시작한다.

고쿠분 료세이 게이오대 동아시아연구소 소장

정리=오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