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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3) 제80화 한일회담(232)-7인 외교자문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박대통령은 정권의 운명을 걸고 한일회담 타결시한을 65년6월까지로 못박았다. 6·3사태는 한일회담이 그대로 진행된다면 충분히 정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사실을 실증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박대통령이 위험한 도박에 정권의 운명을 내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경제개발이었다고 밖에 말할수 없다.
박대통령은 조국근대화를 명분으로 5·l6군사혁명을 일으켰다.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입안됐지만 그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 염출의 길이 막연했다.
박대통령은 그 돌파구를 일본에서 청구권조로 받아올 자금에서 찾았다. 때문에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은 지상과제였다.
64년가을 정부는 반대세력을 약화시키는 묘안을 짜내는데 힘을 기울였다. 앞서 말했듯이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해 보다 유리한 환경에서 한일회담을 추진할수 있도록 하는한편 국내 반대세력에도 한일관계정상화의 당위성을 설득해 주도록 한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각기 다른 이해에서 한미양국정부는 이해를 같이했고 그 결과「브라운」주한미대사는 야당및 지식인을 상대로 설득작업을 활발히 폈던것인데, 나는 이 과정을 통해 미국은 자기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지 한다는 무서운 사실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이동원장관은 또 유력한 여론 형성층을 상대로 그들을 정부편에 끌어들이기 위해 자유당정권당시 있었던 외교위원회의 후신으로 외교자문위를 구성했다.
이장관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장관직에 취임하고 보니 외교정책을 심의하는 자문기관이 없어요. 국제정치학을 전공했으나 나이도 젊고 외교관생활이라곤 주태대사 7개월 정도가 고작이어서 앞으로 헤쳐나가야할 방대한 외교 추진을 위해서는 자문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요. 외교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하며 특히 한일회담은 더욱 그래야한다고 믿고 국민의 의견을 전달받을수 있는 기관설치를 구상한 것이지요.』
이장관은 본부대사였던 최규하씨의 조력을 받아 유진오박사(제5차 한일회담수석대표·고려대총장) 언론인 홍종인씨(동화통신회장) 변호사 김갑수씨(대법원장직무대리역임) 신태환박사(서울대총장) 경제인 김용완씨(전경련회장) 엄요섭 전주일공사 김활난박사(이대총장역임)등 7인으로 외교자문위를 구성했다.
이장관은 9월9일 이 기구를 발족시키고 9월24일 첫회합을 갖고는 보통 1주일에 한차례씩 이들과 만나 한일회담등 주요 외교현안에 대한 정책토론을 해서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이들 구성을 보면 학생들에게 영향력이 큰 유박사·신박사·김박사등 학계원로와 홍박 (홍종인씨 애칭)은 물론 특히 동아일보와 관계가 있던 김용완 전경련회장등으로 이뤄져 대학생 언론정책등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이장관은 이에 그치지않고 초당외교협의체를 구상했다. 9윌 중순 청와대의 정부·여당연석회의에서 이장관은 그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공화당 중진들은 이장관이 한일회담을 타결하겠다고 장관직에 취임했으면 일본에 가서 빨리 매듭을 지어야지 국내에 앉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막상 회담에 임하자니 겁을 먹은게 아니냐고 인신공격에 가까울 정도로 비판했다고 한다.
왜 일본에 안 가느냐는 여당중진들의 성토에 이장관은 초당외교협의회 구상안을 제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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