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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보이는 병실 환자, 진통제 덜 쓰고 퇴원도 빠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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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서울병원 암병동은 한쪽 벽을 15m 유리로 만들어 환자와 보호자가 개방된 공간에서 햇빛과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지어졌다. 서보형 객원기자

병원은 차갑다? 흰색으로 상징되는 차가운 이미지의 병원 공간이 따뜻하게 바뀌고 있다. 아픈 사람의 정서를 어루만지며 환자 만족과 심신의 안정을 끌어내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벽에 알록달록한 색을 칠하거나 정원을 꾸미고, 벽에 창을 내는 것은 기본이다. 환자에게 최적화 된 ‘치유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경건축학’이다. 환자의 뇌력(腦力)과 체력(體力)이 자신이 머무르는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에서 출발했다. 과연 공간이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약’이 될 수 있을까.

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

명지병원 소아응급센터 출입구(위)와 대기실의 모습(아래). 만화 속 한 장면처럼 꾸며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감을 높인다. [사진=명지병원]

환자와 사람에 맞는 건물을 짓다

유럽 최초로 모자보건센터를 도입한 막시마 메디컬센터(Maxima Medical Center). 산모와 아이 중심의 공간을 지향한다. 분만실 벽면에는 산모의 진통 간격이나 지속시간에 따라 꽃봉오리가 피도록 모니터를 설치했다. 출산 때 이 꽃은 산모의 얼굴처럼 활짝 핀다. 미숙아 치료실은 엄마의 자궁과 유사하도록 조명·온도·소리를 조절한다. 공간은 엄마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밀착하는 ‘캥거루 케어’ 효과를 제공한다. 병원에 따르면 이곳에 입원한 미숙아는 입원 일수가 다른 병실보다 평균 15일 단축됐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오강섭 교수는 “실내 공간은 시각과 청각 등 인체 오감에 영향을 미치며 신체와 정신적인 건강을 좌우한다”고 말했다.

병원 공간이 환자의 회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는 이미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미국의 심리학자 로저 울리히는 담낭 제거 수술을 받은 환자 46명을 나눠 23명은 입원 병실에 정원이 보이도록 창을 냈다. 나머지는 벽이 보이는 병실을 쓰게 했다. 그 결과 자연을 체험했던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진통제를 덜 복용했고, 퇴원시간도 평균 24시간 빨랐다.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정재승 교수는 “공간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뇌 인지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건축학과 신경과학이 융합된 ‘신경건축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이런 내용이 과학적으로 연구되고 있다”고 말했다.

15m 높이 유리창으로 햇살 접해 암환자 치유

미국 메이요클리닉 레슬리 앤드 수전 곤다 빌딩 대기실은 한 벽면이 전면 유리다. 의자를 창가 쪽으로 놓고, 1년 내내 정원에 핀 꽃과 식물을 볼 수 있게 유도한다.

삼성서울병원 암병원에도 곡선 형태로 된 15m 높이의 전면 유리가 설치돼 있다. 환자와 보호자는 이곳에서 자연과 햇빛을 즐기며 긴장을 풀고 편안함을 느낀다. 이 병원 암교육센터 조주희 교수는 “공간 변화를 통해 고통과 슬픔으로 각인된 병원의 이미지를 바꾸면 환자가 느끼는 불안과 스트레스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암환자는 골다공증이나 불면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은데, 햇빛을 통해 비타민D의 합성을 촉진하면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복도식 요양시설에서는 치매 환자가 방을 나섰다가 자신의 방을 못 찾고 헤매기 쉽다. 환자는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고 방을 나가지 않아 인지능력이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최근 요양시설은 개방 형태로 짓는다. 인지기능을 높이기 위해 로비에 운동기구나 어린 시절 놀았던 장난감, 사진을 배치한다. 정재승 교수는 “유럽의 요양시설은 마치 박물관을 떠올리게 할 정도”라며 “인지기능 향상을 위한 치매환자의 공간 연구에 미국국립보건원이 연간 10억원을 지원하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험이 부족한 아이는 낯선 장소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보폭·눈높이도 어른과 차이가 나서 이정표도 무용지물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런던에 있는 영국왕립어린이병원은 내부를 놀이공원처럼 꾸몄다. 벽에 동화 속 주인공을 그려넣고, LED 모니터를 붙여 만지면 동물이 튀어나오도록 최첨단 기술을 도입했다. 모든 것이 현재 위치를 알리는 랜드마크가 된다. 정서적인 안정감도 높아진다.

명지병원 소아응급센터도 이와 비슷하다. 출입구를 우주선처럼 꾸며 아이들의 거부감을 줄이고, 치료실 천장에 잠자리와 꿀벌 모형의 전등을 달아놓아 친숙함을 더했다. 환자 대기실에는 아이의 키에 맞춰 수족관과 도서관을 만들었다. 이 병원 이왕준 이사장은 “병원은 그 자체가 건강관리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담배 끊고 싶으면 흡연실부터 없애야

병원의 ‘건강 디자인’을 적용하면 집과 사무실을 ‘건강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 공간의 ‘밀집도’는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이다. 병원에서는 파티션을 두거나 동선을 구분해 환자가 타인과의 접촉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를 줄인다. 오강섭 교수는 “일반인도 공간의 밀집도나 소음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느끼는 불쾌감 역시 밀집된 공간에서 분비되는 코르티솔 때문”이라고 말했다. 의자나 책상·소파 등 가구 위치를 조절하면서 편안함이 느껴지는 ‘생활 간격’을 찾는다.

1인 병실은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만 자극이 부족하다. 따라서 환자가 무력감과 우울함을 느끼는 ‘탈핍성 스트레스’가 생기기도 한다. 일반인도 공간이 단조로울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 벽지를 바꾸거나 소품을 놓아 이를 극복한다.

건물 구조를 바꾸기 어렵다면 창을 활용해 보자. 병원 리모델링 전문업체 위아카이 노미경 대표는 “병실에 창을 내고 커튼이나 윈도 셰이드로 빛을 조절하면 환자의 심리적 안정감도 높아진다”며 “인공조명과 스위치를 이용해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공간 선택도 중요한 문제다. 오강섭 교수는 “감정을 처리하는 뇌의 편도는 특정 공간의 자극을 받아 정보를 강력하게 되살려낸다”며 “우울증이나 중독 증상은 특정 공간에서 더 악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주희 교수도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로 병원 로고만 봐도 울렁증이 생긴다는 환자도 있다”고 말했다. 건강을 위해 멀리해야 할 공간이 있다. 즉, 금연을 하려면 담배를 피우는 옥상과 흡연실을 먼저 피해야 한다는 얘기다.

참고서적=<공간이 마음을 살린다> <공간은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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