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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소설 읽기] 내 안의 스칼렛, 내 안의 리비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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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한 장면. 레트(클락 게이블)가 스칼렛(비비안 리)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내가 그동안 알아 온 여인들 중에 가장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캐릭터였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밉상’이었다. 사춘기 소녀의 눈에 비친 스칼렛은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오히려 좀 멍청하고 덜 떨어져 보이는 여자였다.

하지만 ‘잊을 수 없는 한 여자의 눈빛’이라는 테마로 사진을 100장쯤 모은다면 그녀는 항상 내 마음속의 톱10 안에 들었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 톱100을 뽑더라도 그녀는 항상 순위 안에 들 것이다. 그녀는 결코 바람직한 여인상은 아니지만,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더 매혹적이다. 나는 그녀를 의식적으로는 혐오했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질투하고 있었다. 하루 만이라도 그녀처럼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쟁취하고, 꾸밈없이 욕망을 발설하고, ‘규칙’이 아닌 ‘열망’의 이름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소설 원작을 찾아 읽어 보니 그녀의 과도한 자신감 또한 일종의 뼈저린 콤플렉스임을 알게 되었다.

전쟁이 찾아낸 내면의 억척스러움

그녀는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에서 공주처럼 떠받들리며 자랐지만, 남북전쟁으로 집안이 초토화되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자 가족들은 물론 첫사랑 애슐리네 가솔들까지 먹여 살릴 정도로 씩씩한 여인이다. 그녀는 애슐리의 부인 멜라니가 아기를 무사히 낳을 수 있도록 목숨 걸고 그녀를 지켜 주었으며, 강간을 당할 뻔한 순간에도, 살인을 당할 뻔한 순간에도 재치와 용기를 발휘하여 멋들어지게 상황을 모면한다. 그녀는 남들 앞에서는 더없이 용감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그녀는 반평생을 나약한 지식인 애슐리만 바라보며 살아왔으나, 언젠가부터 불한당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한없이 열정적인 레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남북전쟁은 공주처럼 자란 그녀의 보들보들한 겉모습에 감춰진 강인한 생존본능과 화려한 리더십을 수면 위로 끌어냈는데, 동시에 그녀 안에 숨겨진 탐욕과 잔혹성을 일깨우기도 했다. 어떻게든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에 골몰한 스칼렛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떼돈 벌 궁리만 하기 시작한다. 동생의 약혼자를 빼앗아 결혼하고, 그의 제재소를 자기 것처럼 주무를 뿐 아니라, 심지어 죄수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모두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끝내 부자가 되는 데에 성공한다. 레트는 뒤늦게 자신에게 매달리는 스칼렛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 잔인했어, 스칼렛.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빼앗아서 마치 채찍처럼 그들 머리 위에서 휘둘렀다고.”

그녀는 줄곧 애슐리를 사랑해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실은 마음속에 ‘이상적인 모형’을 만들어 놓고 그 완벽한 모형에 현실의 애슐리를 끼워 맞추려는 환상 놀음이었음을,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레트와 결혼한 후에도 끝없이 애슐리를 그리워하며 레트의 자존심을 짓이겨 버린 스칼렛은 좌절할 때마다 이렇게 스스로를 방어한다. “지금은 그만 생각하자. 내일 다시 생각하자.” 애슐리와의 은밀한 포옹 장면을 만천하에 들키고도 그녀는 도망칠 궁리만 한다. “지금은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것을 견뎌낼 여유가 생긴 다음에, 나중에 생각할 거야.”
하지만 ‘그 다음’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곱씹음으로써 더 나은 자신이 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을 외면한 결과는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활용하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는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는 데는 유용하지만, 이런 경우엔 일시적인 위안 말고는 효과가 없다. 방어기제의 가장 어리석은 형태는 자기기만이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신 포도처럼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을 막상 가져 보면 별것 없을 거야’라는 식의 자기방어는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스칼렛은 끝까지 자신을 속인다. 나에게는 분명히 레트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멜라니가 세상을 떠나고 레트조차 떠나 버린 오늘은 너무 힘드니까, 일단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고. 내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고.

그녀 인생의 가장 큰 암초는 남북전쟁이나 부모님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는 그녀의 ‘부주의함’이었다. 스칼렛은 너무 착해서 오히려 바보 같다고 깔보았던 멜라니가 애슐리와 자신의 끈질긴 스캔들을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는 것을, 멜라니의 임종에 이르러서야 깨닫는다. 그녀는 멜라니의 병약함과 작은 체구를 비웃고, 멜라니에겐 아무런 관능적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무시했지만, 멜라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야 그녀가 때로는 어머니처럼 때로는 수호천사처럼 주변 사람들의 모든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저 성공을 위해 앞으로만 달려가다가 자신이 진정으로 돌봐야 할 소중한 이들을 배려하지 못한 그녀는 겉으로는 ‘알파걸’, ‘수퍼맘’ 소리를 들으면서도 내면은 말할 나위 없이 공허하고 불안한 현대 여성들의 원조 격일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야 스칼렛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 스칼렛처럼 질긴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의 강인한 의식의 빗장은 꿈속에서야 조금씩 풀리기 때문이다. 애슐리에 대한 질투에 눈이 먼 레트와 요란한 부부싸움을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아이를 유산한 스칼렛은 사경을 헤매며 레트를 애타게 찾는다. 그녀는 끔찍한 안개 속을 헤매며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레트를 찾지만, ‘스칼렛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자괴감에 짓눌린 레트는 그녀를 포기하고 만다.

컴플렉스는 진실의 눈을 가린다

한때 나는 스칼렛을 정말 싫어했다. 그런데 너무도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라 도저히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은 그녀의 모습이 TV에 고전 영화로 소개될 때마다, 나는 빠짐없이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되풀이하여 보고 또 보았다. 그러면서 일종의 죄책감 어린 쾌락,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를 느낀 것이 아닐까? 그 은밀한 길티 플레저의 근원에는 스칼렛의 어리석음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하는 원초적인 물음이 있었다. 스칼렛은 타오르고 용솟음치고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리비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갖가지 우아한 제스처로 우리의 욕망을 부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리비도가 우리 생을 밀어 간다는 것이다. 먹고 싶고, 자고 싶고, 놀고 싶고, 쉬고 싶고, 이기고 싶고, 해내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미워하고 싶은 그 모든 에너지가 리비도의 물결을 구성하기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안타깝게도 네 사람의 주인공 모두가 각자의 심각한 콤플렉스에 눈이 멀어 사태의 진실을 꿰뚫어보지 못한다.

레트는 애슐리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멜라니는 명예와 기품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애슐리는 나약한 지식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자책감과 자기연민 때문에. 스칼렛은 ‘내가 레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레트는 절대로 알아서는 안 돼!’라는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나는 애슐리만을 사랑해 왔다’는 감정의 습관 때문에, 레트와 자신이 진정한 솔메이트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어쩌면 이토록 우리네 인생을 닮았을까.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 모든 방어기제들, 즉 자존심과 명예욕과 질투심과 자기연민이야말로 우리에게서 용기를 빼앗아가는 ‘내 안의 적들’이 아닌가. 우리는 그들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관계의 허무를, 무의식의 반격을 성찰할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가슴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자기 안의 스칼렛’을 잘 다독이고, 설득하며, 때로는 눈물을 쏙 빼도록 혼구멍을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정여울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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