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연료 연구 큰 그림 그리게 돼 … 원전 수주도 호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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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대는 잘 만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디에, 얼마나 살을 더 붙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42년 만에 개정된 새 한·미 원자력협정은 한국에 더 큰 외교 과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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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 타결된 새 원자력협정에서 정부가 방점을 찍은 부분은 주권과 권리의 확보다. 서문에 ‘한·미 양국은 평화적 목적으로 원자력을 연구·생산·이용함에 있어 빼앗을 수 없는(inalienable) 권리를 갖는다’ ‘양국 간 원자력 협력 확대에 있어 주권의 침해가 없어야 한다’고 규정한 게 대표적이다. 미국이 원자력협정을 맺은 나라들 중 처음으로 연례 고위급위원회를 한국과 가동하기로 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저농축과 재처리 연구 가능성 등을 협의· 합의하기로 했다는 부분도 과거와 같은 일방적 협정이 아님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농축에 있어선 미래에 대비해 새로운 경로를 마련해 놓았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협의’가 아니라 ‘합의’라는 점이다. 미국이 동의해주지 않는 한 한국이 파이로프로세싱(건식 재처리) 연구와 농축을 추진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농축·재처리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골드 스탠더드’ 규정을 넣지 않는 것으로 한국의 체면은 살렸지만, 미국이 단계마다 제동을 걸 수 있는 새로운 제약 구조도 동시에 명문화한 것이다. 장문희 한국원자력학회장은 “지금이야 논의한 뒤 실제로 우리의 권리를 이행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합의라는 단어를 쓴 것일 수 있지만, 20년의 기간 동안 외교적 상황 등이 변하면 양측이 각기 다른 해석을 하게 될 수도 있다 ” 고 지적했다.

 최소 30년의 유효기간을 요구해왔던 미국으로부터 20년이라는 양보를 받아낸 건 성과다. 한국의 기술 발전 정도를 상대적으로 단기간 안에 협정에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미가 아이오와에서 공동으로 한 파이로프로세싱 연구에서 한국 과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모든 과정을 거쳐도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은 나오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온 것도 비확산 원칙을 주장하는 미국을 상대로 기간 단축을 설득하는 데 주효했다고 한다.

 새 협정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송기찬 한국원자력연구소 핵연료주기기술개발 본부장은 “그간은 ‘공동 결정(joint determination)’ 조항에 묶여 5년간 무엇을 할지 미리 동의를 받고 그 범위 안에서만 연구할 수 있었다”며 “새 협정으로 앞으로는 해보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임만성 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는 이번 협정이 국내 원자력 정책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그동안은 다 말뿐이었지, 미국과의 협정에 가로막혀 실제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용후 핵연료 재활용 연구가 합법화돼 진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전까지 손도 못 대게 하던 사용후 핵연료를 깨서 만져볼 수 있게 한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번 깨보면 관련 기술을 알 수 있고 노하우도 얻을 수 있다. 다음 단계(전해정련) 기술은 미국도 갖고 있지 않다. 한국이 이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일부에서는 일본과 같이 핵연료를 재처리(플루토늄 추출)하거나 파이로프로세싱 개발의 전체 과정을 보장받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일본을 예로 들며 ‘우리한테만 편파적이지 않으냐’고 하는 것은 국제정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산업계도 까다로웠던 원전 수출 절차가 대폭 생략된 것을 환영하고 있다. 한국전력 관계자는 “미국산 원자력 장비·부품이 제3국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공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원전 수주에 성공하면 직·간접 수출 효과뿐 아니라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다.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 4기를 수출할 당시 직접적인 수출 효과로 약 200억 달러, 향후 60년간 원전 연료비·운영·정비 등에 추가로 약 200억 달러를 수출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 게 대표적이다. 중형차 200만 대 수출 효과와 맞먹는 금액이다. 채규남 산업통상자원부 원전수출진흥과장은 “제3국에 수출할 때 건건이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앞으로는 포괄적 승인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한별·유지혜·박유미 기자 wisepen@joongang.co.kr

◆사용후 핵연료=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하고 남은 핵연료를 의미한다. 재사용할 수 있는 플루토늄과 우라늄이 섞여 있다. 원전용 우라늄과 달리 플루토늄은 핵무기를 만드는 데도 쓸 수 있다.

◆파이로프로세싱=사용후 핵연료를 건식 재처리해 소듐냉각고속로(SFR)에서 ‘재활용’ 가능한 핵연료 물질을 뽑아내는 기술. 습식 재처리와 달리 순수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없어 핵무기를 만들기 어렵다. 실용화되면 사용후 핵연료를 직접 처분하는 것에 비해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10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골드 스탠더드(gold standard)=핵연료의 농축과 재처리를 금지하는 원칙을 가리킨다. 미국은 2008년 아랍에미리트(UAE), 2013년 대만과의 원자력 협정에 ‘골드 스탠더드’를 명시했다. 한국과의 새 협정에는 그 조항이 포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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